교황, 주님 수난 성지주일 강론 “세상이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기쁨을 외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환호하는 군중들 사이로 올리브 동산에서 예루살렘까지 입성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신비의 완성인 파스카의 흥겨운 서막이다. 오늘 교회는 종려나무 가지와 올리브나무 가지의 축복과 행렬로 시작된 장엄한 전례를 통해 (이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먼저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예식을 집전한 다음, 햇살이 가득한 성 베드로 광장에 운집해 있는 전 세계의 신자들을 비롯해 특별히 교구차원에서 개최된 제33차 세계 젊은이의 날을 기념하는 젊은이들과 함께 대성전 입구에서 전례를 거행했다.

오늘날 인간의 모순

파키스탄 난민들이 선물한 제의를 입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님의 의기양양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하면서, 군중의 “기쁨과 축제”를 수난 사화의 “고통스럽고 쓰디쓴 맛”과 결합시키는 이번 주일의 전례에 관해 성찰하도록 초대했다. 교황은 이 수난 사화에 “오늘날의 모든 이들”에게 종종 해당하는 “감정과 모순”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데 주목했다.

“많이 사랑할 수 있고, (...) 또 아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가치 있는 희생을 할 수 있고, 또 적절한 순간에 ‘손을 씻을’ 줄 알기도 합니다. 충실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과감하게 버리고 큰 배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사화 전반에 걸쳐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쁨이 불쾌함과 분노의 이유가 되는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쁨은 불쾌함을 자아낸다

교황은 예수님 주위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그분 안에서 “신뢰”, “존엄성”, “용서”, “희망”을 다시 찾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분의 “동정심(compassione, 연민, 측은지심)”을 체험했으며,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찬미의 기쁨은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율법과 예법 규정에 ‘충실한 자’라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불편한 것으로 나타나며, 불합리하고, 스캔들이 됩니다. 아픔, 고통, 불행 앞에서 감성이 차단된 이들에게 기쁨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것 좀 봐, 얼마나 무례한 사람들인가!’ 기억을 잃어버렸고, 주어진 수많은 기회를 망각한 사람들에게 기쁨은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고, 안주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쁨과 축제를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오로지 자신의 힘을 믿고,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요.”

자기 만족과 교만은 꿈과 동정심(compassione)을 죽인다

따라서 교황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경멸, 중상모략, 거짓 증언 선동”으로 “만들어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는 “외침이 탄생했다”고 강조했다. “사실을 꾸미고” “조작하는 자의 목소리”이며, “자기 자신을 강화”하고 “불협화음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해, 그 목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저지하는” 자들의 목소리인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는 “자기 만족, 오만과 교만의 음모로 만들어진” 외침이다.

“이처럼 마지막에 이르러 군중의 축제는 침묵하고, 희망은 무너지며, 꿈은 말살되고, 기쁨은 소멸됩니다. 이처럼 마지막에 가서 마음은 완고해지고, 사랑은 식게 됩니다. 연대감을 잠재우고, 이상을 꺼뜨리며, 시선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너 자신이나 구해보아라’는 외침입니다. (...) 그 외침은 ‘동정심(compassione)’을 제거합니다. ‘함께 겪는다’는 뜻의 그 ‘동정심(compassione)’은 하느님의 약함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의해 질문을 받도록 내어 맡기자

교황은 성주간을 시작하며 “소리지르는 이 모든 목소리” 앞에서 유일한 “해독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무도 성부의 자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하고, “아무도 복음의 기쁨을 꺼뜨리지 않도록” 하는 구원의 외침이며, “거룩한 자들이자 죄인들”이요, “젊은이들과 노인들”인 우리 각자를 위한 사랑의 외침인 그분의 “마지막 외침”으로부터 질문 받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우선순위, 선택, 행동에 대한 질문을 받도록 (자신을) 내어 맡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순간을 살거나, 어려운 순간을 거치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감성에 의문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봅니까? 예수님이 계속 우리 마음에 기쁨과 찬미의 이유가 됩니까? 아니면 죄인들, 취약계층, 잊혀진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그분에 대해 우리는 부끄러워합니까?”

젊은이들은 부패한 세상의 강요된 침묵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교황은 강론의 마지막 부분을 교구차원에서 개최된 제33차 세계 젊은이의 날을 맞이한 젊은이들에게 할애했다. 교황은 젊은이들의 기쁨이 조작될 수 없기에 불편함을 준다고 강조했다. 이 때문에 종종 세상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젊은이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만들며, 그들의 꿈이 “빈약하고 슬픈, 바닥에 떨어진 몽상”이 되도록 “마비시키고”, “보이지 않도록 만들면서” 젊은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애쓴다고 말했다. 바로 여기서 복음 안에 나오는 예수님의 초대를 젊은이들에게 다시 제시하는 교황의 강력한 호소가 나온다.

“친애하는 젊은이 여러분, 외쳐야 할 결정은 여러분에게 있고, 성지 주일에 호산나를 외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지 않도록 결정하는 것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 침묵하지 않는 것도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침묵하더라도, 너무 자주 부패를 저지르는 우리 노인들과 책임을 맡은 이들이 침묵하더라도, 세상이 침묵하고 기쁨을 잃더라도,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외치겠습니까?”

“제발 바라건대, 부디, 돌들이 소리지르기 전에 결정하십시오(루카 19,4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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