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을 변호한 인도 출신 라니 마리아 수녀, 복자품에 오르다


“라니 수녀는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랐습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지난 1995년 2월 25일 살해당했습니다. 암살자는 54회에 걸쳐 그녀를 칼로 찔렀습니다. 이는 진정한 학살이었습니다. 라니 수녀는 살해당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불렀습니다.”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이 11월 4일 라니 수녀를 복자품에 올리면서 이같이 말했다. 오늘, 글라라 수녀회 소속인, 마리암 바탈릴, 곧 레지나(라니) 마리아 수녀의 시복식이 있었다. 시복식은 인도의 인도르(Indore)에서 거행되었으며, 교황을 대신하여 아마토 추기경이 집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월 23일 라니 수녀의 순교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복자품에 올리기로 승인한 바 있다.

라니 수녀는 인도의 케랄라(Kerala)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순교하기 전, 약 2년 반 동안 인도의 마디아 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에 위치한 인도르 교구 내의 우다이나가르(Udaynagar)에서 일했다. 라니 수녀는 특별히 마을의 농부들과 부녀자들을 위해 일했다. 라니 수녀는 버스를 타고 마디아 프라데시 주도인 보팔(Bhopal)로 이동하면서, 강제로 버스에서 하차 당했다. 살해자는 많은 승객들이 보는 가운데 라니 수녀를 수차례에 걸쳐 칼로 찔러 살해했다. 사실, 인도 농촌의 변화 속에서 힘있는 자들의 법에 저항하는 사람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는 분명히 상상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그 지역의 ‘기득권자’들을 못마땅하게 만들었다. 아마토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력과 살인의 이유는 라니 수녀가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토지를 차지한 이들의 불의로부터 (토지가 없는) 가난한 이들을 옹호했기 때문입니다. 라니 수녀는, 구체적인 협력과 소액 대출의 시도를 통해, 소지주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예방하고 그들을 절대적 불행의 슬픈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큰 반향을 가져왔다. 라니 수녀의 장례식 후에는 다른 종교를 포함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마디아 프라데시 주의 모든 기관과 단체들은 일제히 문을 닫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 후에, 그녀를 살해한 사람이 겪은 회개는 의미 있는 것이었다. 살인자 사만다 싱 (Samandar Singh)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회개하고 깊은 변화를 겪었다. 이어 지난 2002년에는 라니 수녀의 여동생 셀미 폴(Selmy Paul) 수녀와 화해의 포옹으로 그 변화의 절정을 체험했다. 싱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의 석방을 위해서 애써준 라니 수녀의 유가족 덕분에 교도소에서 석방됐다. 셀미 수녀는 최근 아시아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우리 수녀원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으며, 자주 우리를 찾아옵니다. 아울러 매년 라니 마리아 수녀의 기일에 그녀의 무덤에 가서 참배하면서, 새로운 삶의 표징으로 자신이 농사 지은 곡식을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마디아 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는 힌두교 극단주의의 중심 거점 가운데 하나다.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은 우다이나가르(Udaynagar) 선교와 인도 교회 전체를 위한 라니 마리아 수녀의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 많은 선교사들이 선행을 실천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라니 수녀로부터 영감과 보호를 받습니다. 순교자들은 항상 새로운 그리스도인 세대를 위한 땅을 비옥하게 했습니다. 클라라 수녀회는 알폰사 무타투빠다투(Alfonsa Muttathupaddathu) 성녀의 천상에서의 보호에 이어 라니 마리아 바탈릴 복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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