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그대로 앙갚음해 줄께”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대로 앙갚음해 줄께”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바오로 6세 홀에서 그리스도인의 희망에 대한 교리를 진행하시면서 일반알현을 하셨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 째 편지에서 «우리는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라는 아름다운 말로 부활의 희망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라고 권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단지 개인적이거나 개별적인 바램이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모두는 희망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나 공동체적으로 희망합니다.

희망 안에서 서로 돕고 의지함

그래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 도우라는 요청을 통해, 시선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현실적인 일들로 확장됩니다. 서로를 돕는 것. 그러나 필요한 것들, 일상 생활에서 필요한 것들만이 아니라 희망 안에서 서로를 돕고, 희망 안에서 서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목적 인도와 책임을 위임 받은 이들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들은 희망을 성장시키도록 부르심을 받은 첫 번째 사람들이고, 이것은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직무의 힘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다른 이들의 존중과 이해, 그리고 호의적인 도움이 무척 필요합니다.

낙담한 이들 가까이

희망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거나 절망에 빠질 위험에 있는 형제들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안 좋은 일을 겪고 있는 이들의 소식을 항상 듣고 있지 않습니까? 절망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가져옵니다. 희망을 잃은 사람, 나약한 사람, 삶과 자신이 지은 죄의 무게 때문에 용기를 잃은 사람들, 그리고 다시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온 교회의 따스함과 가까이 다가감은 더 애정 있고 참된 것이어야 하고, 동정심이 아니라 애정 어린 공감의 형태를 취해야만 합니다: 공감은 다른 이들과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가지고 고통 당하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공감입니다! 그들은 위로와 위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참되고 구체적인 애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나약한 이들의 약점을 그대로 받아 주어야 하고, 자기 좋을 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받아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의 약함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만 국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증언은 사회 문화적 현실 안에서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만들자는 호소로, 악을 악으로 되갚지 말자는 호소로, 선으로 악을 이겨내고, 모욕을 용서로 이겨내자는 호소로 울려 퍼집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대로 너에게 앙갚음 할 거야!’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아닙니다! 용서는 모욕을 이겨냅니다; 모든 이들과 평화로이 지내는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사랑의 온화하고 강한 모습을 취할 때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강하고 온화합니다. 그리고 아름답습니다.

홀로 배울 수 없는 희망

이제 아무도 홀로 희망하는 것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무도 혼자서 희망하는 것을 배울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희망은 스스로를 키워 나가기 위해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지탱하고 서로를 힘있게 만들어 주는 몸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만약 우리가 희망한다고 하면, 그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이 우리에게 희망하는 것을 가르쳤고, 우리들의 희망을 살아있게 했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 중에 미천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 단순한 이들과 소외 받은 이들이 눈에 띕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평안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희망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평안만을 바라는데, 이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안전함입니다; 항상 모든 것이 문제 없다고 느끼는 사람, 자기 만족에 몰두하는 사람은 희망을 알지 못합니다. 반대로 매일 시련, 불확실함, 그리고 한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희망하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더 아름답고 강한 희망의 증언을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슬픔과 억압, 그리고 죽음의 필연성 저 너머 최후의 언어는 자신의 것이고, 그 언어는 자비와 생명과 평화의 언어라는 것을 알면서 주님께 의지하며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언젠가 이 말을 듣게 되리라 희망하고 있습니다: ‘형제여, 내게로 오너라; 자매여, 내게로 오너라, 영원히’.

성령 없이는 가질 수 없는 희망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이미 말한 것처럼, 만약 희망의 자연스러운 거처가 여러 지체가 결합된 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경우에 이 몸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생기 있는 숨결과 희망의 영혼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 없이는 아무도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끝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성령을 간청하라고 초대하는 이유입니다. 믿는 것이 쉽지 않다면, 희망하는 것은 더 그렇습니다. 믿는 것 보다 희망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아닙니까?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 안에 머물러 계실 때, 두려워해서는 안되고,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성령 강림절 안에서 인류를 위해 희망의 살아있는 징표로서 우리 공동체를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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