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엘리사벳은 이 말로 자기 집에 오신 마리아의 현존을 흠뻑 적십니다. 이 말은 그 태중에서, 그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사촌의 방문으로 체험했던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는 것입이다.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4-45).

하느님께서는 여인의 태중에서 우리를 방문하시는데 다른 여인의 태중 흔드시며 기쁨과 찬미의 노래와 축복을 내리십니다. 복음이 보여주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방문의 역동성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우리 내면 전체를 흔드시고 우리의 인생을 찬미와 축복으로 변화시키기까지 모든 것을 움직이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거룩함의 충격으로 흔드십니다. 그 거룩함의 흔들림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함께 살아계시다는 것을 선포하도록 초대되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마리아 안에서 보는 것과 같이 마리아께서는 첫 제자와 선교사, 계약의 새로운 성궤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성전에 보존되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시어 태중에 있는 요한을 방문하시고 그를 동반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1531년에 일을 이루십니다. 성모님은 고통 속에 있는 백성을 동반하시며 도와주시기 위해 테페약으로 달려가십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우리 모든 백성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엘리사벳과 함께 우리는 오늘 다음과 같이 외치면서 기쁨에 적시려고 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45절)란 말씀을 계속하면서 말입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제자요, 믿는 여인으로서 우리가 건너야 하는 여러 관정들에서 우리 신앙과 희망을 동반하면서 용기를 주시는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마리아 안에서 “시적으로 세련된 신앙이 아니라 강한 신앙, 특별히 사물들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찢어지고 많은 것들이 충돌하고 있는 곳에서도 강한 신앙”(로마노 과르디니, 주님, 44)을 반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의 특징인 이 강인하고 봉사적인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인생과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역사 안으로 들어갈 줄 아는 이 신아을 배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건설하고 있는 사회는 분열과 쪼개짐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특히 자기 인생을 품위 있게 보존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을 간직하는데 어려움을 갖고 있는 많은 이들을 간과했습니다. 이 사회는 기술적 학문적 발전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만 교만으로 소수를 잊어버리고 배제하면서 발걸음의 뒷전에 밀려난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대해서 무감각하고 눈을 감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사회는 많은 형제들 안에서 좌절과 각성, 실망의 문화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는 길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어려움을 체험하는 사람들 안에서 고뇌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은 ‘불신의 사회’ 안에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재와 특히 미래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런 불신은 조금씩 실망과 감각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우리 라틴 아메리카 대륙이 기차역과 지하철역 혹은 어떤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자고 구걸하는 수 많은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볼때 웰빙이란 사회를 자랑삼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동차 유리를 닦아주면서 길거리에서 동전을 구걸하고 불안정한 일을 하도록 버려진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인생의 기차에서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죽음의 시장에서 희생되는 자기 자녀들을 보는 고통으로 누벼져 있습니까.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하는 노인들을 배척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 우리를 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은 생산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파레시다에서 우리 주교들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 여인들의 품위를 강탈하는 불안정한 상황’을 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어떤 여인들은 어릴 때부터, 청년시기부터 집 안과 밖에서 다양한 폭력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아파레시다 문헌 48). 그것은 우리를 풍에 걸리게 할 수 있고 우리 신앙, 특히 희망과 미래를 바라보고 대면하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합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엘리사벳과 함께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그리고 우리는 그 강한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의 특징인 그 강한 신앙과 봉사하는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성모님의 축일을 거행하는 것은 우선 어머니를 기억하는 것이며 우리는 버려진 고아와 같은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결코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계신 곳에 항상 집의 향기가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있는 곳에 형제들은 싸우다가도 일치의 의미를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어머니가 있는 곳에 형제애를 위한 노력이 있을 것입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많은 경우 혼자서 힘겨운 수고를 하면서도 자식들을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많은 어머니들을 보았던 것은 인상적인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 자녀들인 우리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불신과 눈이 먼 사회, 그리고 실망과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와 대항하는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의 기쁨을 강화하기 위해 싸우시는 여인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에 살을 주시는 싸움을 하는 분입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바라보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 말씀을 육화시킬 줄 아는 사람들을 방문하시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내면에 하느님 자비의 살아 있는 징표들이 되면서 하느님의 생명을 육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방문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을 기념하는 것은 “모든 희망을 삼켜버리는 듯한 인생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우리 백성의 인생과 마음에서 희망을 내리치는” 징조를 거슬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은 믿으셨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시며 당신 형제들의 종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처럼 그분의 시선과 그 분의 자비로운 마음과 그분의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만나러 밖으로 나가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관상하는 것은 그분의 신앙을 본받으라는 강한 초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가 화해하고 우리의 축복받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대를 만들어 내기 위한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분의 현존은 생명에 ‘예’라는 대답을 주고 그 모든 무관심과 배척, 사람과 백성의 배척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시선은 우리를 형제로 만듭니다. 우리는 그것을 행합니다. 왜냐하면 후안 디에고처럼 우리는 여기에 우리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그분의 보호의 그늘 아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 보호의 그늘은 우리 기쁨의 샘이고 우리는 그분의 품 안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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