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의 ‘네’라는 대답을 기다리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월 8일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을 맞아 성 베드로 광장에 운집한 순례자들과 함께 삼종기도를 바쳤다.

교황은 삼종기도 전 말씀을 통해 창세기의 ‘아니요’라는 부정의 대답을 조건없이 전 생애를 건 위대한 ‘네’라는 대답으로 바꾸어 낸 마리아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네’라는 대답을 통해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삼종기도를 마친 후에는 인도네시아의 지진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기도를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축일 삼종기도 말씀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축일 축하합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의 독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 두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근원으로 우리를 이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 대신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을 때나, 스스로의 결정으로 행동하려 했을 때, 스스로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거부의 시작과 악의 근원 그리고 인간의 악에 대하여 보여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에서 떠나오게 되고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며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숨어서 주변 사람 탓을 하게 됩니다.(창세3.10,12 참조) 두려움은 증상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는 이가 보여주는 증상입니다. 두려움은 자신이 하느님을 거부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타인의 탓을 하거나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게 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이 악에 머물러 있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즉시 찾아주시며 걱정 가득한 물음을 던지십니다. ‘너 어디 있느냐?’(9절) 마치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아라. 어디에 있는 것이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할 질문입니다. ‘어디에 있느냐? 어떤 상황에 처한 것이냐?’ 하느님께서는 맨 처음 창조해 주셨을 때처럼 간극이 메워질 때까지 엄청난 인내심으로 묻고 계십니다. 두 가지 이야기 중 하나였습니다.

두 번재 중요한 말씀은 복음에서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머물기 위해 오실 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대한 ‘네’라는 대답으로 가능해졌습니다. 죄는 아니라고 했겠지만 ‘네’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께서 수태고지를 받던 순간의 위대한 ‘네’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 사이로 걸어오실 수 있기 시작하셨습니다.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엄마의 태중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 자란 힘 쎈 어른의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모든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우리와 모두 같은 과정을 통해 태어나셨습니다. 거부라는 단 한가지만 빼고 말입니다.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가 선택되었습니다. 원죄없이 잉태되신 유일한 창조물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는 한 마디로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은총이 가득’(루카1.28) 하십니다. 즉 은총으로 충만하십니다. 그분께는 은총이 가득하셔서 죄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도 성모님께 향하면 이 아름다움을 알아가게 됩니다. 악의 그림자조차 없는 은총으로 가득하신 분을 청해봅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38절) ‘뭐, 이번에는 하느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다음에도 제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그때가서 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안했습니다! 그분의 답은 완전한 것이며 전체였고 조건없이 전 생으로 하는 답변이었습니다. 처음 부정적인 대답으로 인해 인간이 하느님께 가는 길을 닫혔다면 마리아의 긍정적인 대답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네’라는 답변입니다. 원죄의 오만한 거부를 이긴 겸손한 긍정입니다. 반항을 치유하는 충직한 긍정의 답변이며 죄의 이기심을 넘어서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네’라는 답변입니다.    

우리 각자도 네와 아니오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떨 땐 적당한 ‘네’를 답하는데 선수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나 우리 양심이 권하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함도 압니다. 우리는 교활해서 완전한 부정을 말하지 않는 대신 하느님께,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혹은 ‘오늘은 안됩니다. 내일은 될 거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며, 내일은 기도할거야. 선을 실천할거야. 내일부터’ 이러한 교활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부정으로, 죄와  적당함의 아니요라는 대답으로 이끕니다.  ‘네, 하지만…’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네 주님,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선으로 향하는 문을 닫아버립니다. 긍정의 답이 존재하지 않는 자리를 악이 밀고 들어옵니다. 우리 각자는 내면에 이런 모습들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부족한 ‘네’라는 답변을 생각하고 찾아봅시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 향한 긍정의 답변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듭니다. 하느님께 ‘네’라고 답변하는 것은 진정 근원적인 것이며 이 근원에는 내면을 못나게 만드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우리 내면을 못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빨르게 그리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향한 긍정의 대답은 우리와 타인들을 위한 구원의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마리아의 응답으로 그리 되었듯 말입니다.

대림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길 원하시며 우리의 답변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생각해봅시다. ‘나는 오늘, 하느님께 어떤 긍정적인 답변을 드려야 할까?’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계신 주님의 목소리, 하느님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청하시고 나아가길 원하신다면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선한 당신의 뜻을 제 안에서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하십시오. 이것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랬듯이 너그러움과 믿음으로 우리 각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네라고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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