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목적지와 우리의 갈망은 인생의 평원에서 하느님 백성과 함께 용서와 화해의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17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서임했다. 추기경단은 이제 228명이 되었고 그 중 121명이 선출권을 지닌 추기경들이다. 다음은 서임식에서 행한 교황의 강론이다.

우리가 조금 전에 들은 복음(루카 6, 27-36. 참조)을 많은 사람들은 ‘평원의 연설’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임은 열두 제자들을 뽑으신 다음 군중들이 그 말씀을 듣고자 기다리고 있고 치유받고자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내려가십니다. 사도들의 부르심은 바로 이 평원을 향한 ‘길을 걸어가는 것’ 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군중과의 만남은 일종의  ‘고통스러운 것’(18절. 참조)이었습니다. 높은 산 정상 위에 머무르는 대신 제자들에 대한 선택은 군중의 마음으로 인도되고 그 삶의 바탕인 고통스런 상황에 있는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주님은 그들과 우리에게 참된 꼭대기는  평지에 도달하고 평지는 우리에게 꼭대기는 일종의 시선, 특별히 부르심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네 가지 명령으로 되어 있는 이 초대에 대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들의 성소를 그 매일의 삶에서 구체화하는데 필요한 네 가지 권고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네 가지 행위들입니다. 그 행위들은 일종의 모양과 살, 그래서 제자가 걷는 길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자비의 신비 교육을 위한 네 가지 단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동일할 생각을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 네 가지 행위들은 우리 친구들과 우리와 가까이 혹은 멀리 있는 이들과 함께 그 습관과 선호도, 그리고 그 감정상에 있어서 쉽게 실현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런 행위들의 대상자들이 우리라고 하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떠오릅니다. 이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주님은 완곡한 어법을 사용하시면서 말씀을 빙빙 돌리지 않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면서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27-28. 참조)

이런 행위들은 원수처럼, 그리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앞에 서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이들 앞에서 우리의 내면적이고 첫 번째 반응은 신뢰를 두지 않고 믿지 않으며 저주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그들을 떨어내기 위한 ‘거룩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들을 ‘악마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반대로 원수와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과 당신을 저주하거나 악소문를 퍼트리는 사람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을 지닌 것 앞에 서 있습니다. 그 가르침 속에는 그분의 힘과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의 기쁨의 샘과 우리 사명의 힘과 복음의 선포를 할 힘이 나옵니다. 원수는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자녀들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는 벽을 쌓아 올립니다. 그리고 장벽을 치고 사람들을 분류합니다. 하느님은 자녀들을 갖고 계시며 당신 곁에서 그들을 떨구어 내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에 대해서 성실함의 맛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면에서 나오는 사랑이고 부모님의 사랑이며 그래서 결코 자녀들을 버리지 않는 사랑입니다. 비록 자녀들이 실수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착한 사람들이 될 때에 세상을 사랑하시려고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덜 불의하거나 완벽하게 될 때에 가서 우리를 사랑하시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자 우리를 선택하셨고 자녀들이 따라야 할 원칙들을 주셨기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로마 5, 10. 참조).  모든 이에 대한 아버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이룩되었고 그것은 판단하고 분열하고 반대하면서 단죄하는 경향을 지닌 우리의 가난한 마음이 회개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도 계속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사명을 위해서 무한한 신뢰와 공경의 원천인 것입니다. 더러운 그 어떤 손도 우리에게 선사하시고자 하는 생명을 그런 손에 쥐어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을 방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세계적인 심각한 문제들과 질문들로 점철된 특징을 지닌 시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표면적으로도 드러나고 있는 양극화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이는 배척이라고 하는 것이 발생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난민이나 이민자, 혹은 아직 인정받지 못한 지위에 처한 사람이 순식간에 원수의 지위로 변화되고 폭력의 대상자가 되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피부색, 언어나 그 사회적 조건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신앙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논리는 우리의 생활, 행동 진행 방식 속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원수가 되어 버리는 상황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금씩 이런 차이는 미움과 폭력, 배척으로 변화되어 버립니다. 이런 상처들은 원수와 폭력의 표면상 원인이 되고 어디에서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소리는 무관심주의라고 하는 질병 때문에 약화되고 그 소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불확실성과 고통의 상황이 우리와 그리고 민족들 사이에 성장하고 있는 원수라는 인식을 통해서 심어지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사이에, 우리 공동체 안에, 우리 사제들과 우리 모임들 안에 그것들이 있습니다. 양극화와 원수됨의 질병은 우리의 생각, 체험, 행동하는 방식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서 면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는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그래서 결국 이 추기경단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교회의 보편성과 풍성함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멀리서 왔습니다. 우리는 다른 풍습과 피부색, 언어, 사회적 조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전례 안에서 신앙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원수 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우리의 가장 위대한 풍성함의 한 표현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예수님은 ‘산에 내려오시는 것’을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비의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상황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백성의 그 ‘평원’ 에 우리를 부르시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화해의 표징으로 우리 시대의 사람에게 희망을 견지하면서 우리의 생활을 빛나게 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교회인 바 우리는 그 품위를 상실하고 상처 입은 많은 형제자매들의 상처들을 바라보도록 우리 눈을 뜨라고 초대받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새롭게 서임된 추기경님, 하늘을 향한 발걸음은 평원에서, 그리고 함께 나누는 일상의 생활에서, 헌신적으로 바친 생활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매일의 조용한 선물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정점은 바로 사랑의 그 품질입니다. 우리의 목적지와 우리의 갈망은 인생의 평원에서 하느님 백성과 함께 용서와 화해의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추기경님, 당신은 오늘 당신의 마음과 교회의 마음 속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자비롭게 되라는 초대를 간직하라고 요청받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복음의 기쁨, 4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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