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상황에서 혼인과 가정의 유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청립 요한 바오로 2세 혼인과 가정 대학원 구성원들과 만남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겼다.

공경하올 주교님과 대학원장님, 그리고 친애하는 교수님, 학생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교황청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원 설립 제35주년을 맞는 이 새로운 학년도를 시작하게 되어 대단히 기쁨니다. 총장 빈첸조 팔리아 주교님과 대학원장 피에르안젤로 세퀘리 몬시뇰께서 해 주신 말씀에 감사드리면서 대학원을 이끌어 나가는데 봉사했던 모든 분들께 존경을 표합니다.

1. 이 대학원을 간절히 원했던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은 오늘날에도 그 풍성함과  현실성에 있어서 더 존중받고 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그 지혜로운 식별은 교회와 인류 사회에 남녀 인간의 혼인 계약에서 출발하여 탄생되는 유대의 첨예하고 깊은 의미를 강하게 다시 회복시켜주었습니다. 5개 대륙에서 발전한 이 대학원은 그 과정을 통해 ‘가톨릭적’ 형식의 유효성과 의미를 확인해 줍니다. 이 과정의 유효성은 높은 수준의 대학원을 탄생시켰고 종교적 분야와 다른 문화에 속한 다른 모든 대학원들과  대화와 교류를 증진시키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학원들은 오늘날 인간의 이 아주 첨예한 점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2. 현재의 상황에서 혼인과 가정의 유대는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기도취적인 개인주의를 찬양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성을 간과하는 자유의 개념, 공동선에 대한 무관심 주의의 성장, 그리고 모든 가정의 미래를 파괴하는 빈곤의 증대처럼 가정에 대한 계획을 직접적으로 파괴하는 이념을 강제하는 것들은 현대의 가정에 위기의 이유들입니다. 그 다음 인간 생명의 참된 존엄성과 대립하면서 실행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에 의해 새롭게 등장한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이 새로운 지평의 복합성은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원과 교황청 생명 학술원 사이의 보다 더 긴밀한 결합을 요구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민감한 내용들과 새로운 것들을 칠하거나 향수를 뿌리거나 그리고 적응시키면서 습관화시켜버리려는 유혹에 떨어지지 말고” 요구되는 모든 힘을 다하여 그런 것들을 용기있게 다루어 줄 것을 여러분에게 부탁드리고자 합니다(아르헨티나 교황청립 대학 총장에게 보낸 서한, 2015년 3월 3일).

인간과 그 생명의 근본적 감성들을 건드리는 불확신성과 무질서는 ‘우리’보다는 ‘나’, 사회 보다는 개인을 더 우선시 하면서 모든 유대들, 가정과 사회적 모든 유대들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스르는 일종의 성공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세상과 그 역사를 남녀 인간의 혼인 계약에 맡기셨기 때문입니다(창세 1,28-31). 이 계약은-동일한 본성상-협력과 존중, 너그러운 헌신과 공동 책임성, 종속과 악용의 근거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약속과 풍요로움으로서 차이를 인정하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 남녀의 품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 상호 관계성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수반하게끔 합니다. 이 차이점을 거쳐서 우리 인성을 알아가는 것 없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가 되버린 바 그 구체적 인성을 깊이 있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인간 남여가 서로 이야기하고 질문하며 사랑하고 함께 행동하면서 서로 자비롭게 존중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별이 다른 것에 대한 품위를 재발견하는  현대 문화의 공헌을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이성을 죽여버리는 문제들을 해결하기보다 그 차이성을 지워버리려고 하는 경향으로 장애받고 있는 듯한 문화를 확인하는 것은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가정은 남녀 인간의 창조적인 계약의 시초에 대체할 수 없는 요체입니다. 이 유대는 창조주이시며 구세주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탱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관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양한 방식들은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인 다양한 유대들 속에서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 계약의 가족적 모습과 사회적 형태들 사이에 공존하는 깊은 관계성은-종교와 윤리, 직업, 경제, 정채, 생명에 대한 돌봄, 세대간의 관계- 이미 보편적으로  분명한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남자 여자 사이에 일들이 잘 될 때 세상과 역사도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 세상은 살기에 적합하지 않게 되고 역사는 정지하고 맙니다.

3. 인성과 가정의 그리스도교적 경험의 아름다움은 보다 깊이 영감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가정에 대한 사랑의 사명을 위해서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교회는-가족적인 백성이라고 여겨지는 교회- 가정 안에서 인류 전체 가정과 맺으신 하느님의 계약의 이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커다란 신비라고 선언한 것입니다(에페 5,32. 참조). 교회의 사랑은 우리 시대에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진리와 아름다움을 읽어 해석할 능력을-교의적, 사목적 측면에서- 보다 더 발전시키도록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복잡한 조건에서 하느님의 계획을 비추는 것은 특별한 사랑의 지식을 요구합니다. 또한 인간 사이에 사랑의 상처와 거짓성에 대해서 자비와 연민으로 감화된 강한 복음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적 창조의 특별한 ‘발명’을 복원하기 위해서-말하자면 거의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 최대한의 용기를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복원은 교의적이건 실천적이건, 사목적, 증거적이건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과 남녀 인간과 그 자녀들의 관계의 역동성은 현재 세상과 역사가 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 자신의 사랑 안에 자리하고 있는 그 깊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위대한’ 계시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이계획을 세상의 사랑 안으로 가져오오는 생명의 힘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젊은 세대들이 이 계획을 포기하고 점령당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담아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2코린 4,7. 참조). 죄가 존재하는 것처럼 은총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속임수에 빠져들지 않는 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창조적인 계획을 복원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자주 “우리는 혼인에 대한 신학적 이상을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소개했고 거의 실제 상황과 그런 바 가정의 효과적인 가능성들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인 것으로 만들었었다. 이러한 지나친 이상화는 은총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재발견하지 않았을 때,  혼인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끌림도 없는 그래서 그 정반대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사랑의 기쁨, 36). 하느님의 정의는 그 약속에 충실한 것 안에서 빛납니다. 이 광채는 예수님의 계시에서 배웠듯이 그분의 자비입니다(로마 9,21-23. 참조).

4.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서 이루어진 두 번의 세계주교대의원회의는 모든 이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열어주는 인간 사라으이 이 신비에 대한 교회의 이해와 사목을 펼쳐야 할 필요성을 공통적으로 표시했습니다. 사도적 권고 사랑의 기쁨은 이 확장의 보물이며 전체 하느님 백성이 교회의 가족적인 측면을 보다 더 가지적으로 그리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만들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하고 그들의 사랑으로 주님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가정들은 그 가정들 자체가 수반하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서 보다 더 깊이 인식하도록 불렸으며 모든 가난한 사람들, 자리를 잃어버리고 되찾을 희망도 없이 버려진 이들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다는 긍지심을 갖도록 불렸습니다. 오늘날 사목의 주제는 단지 혼인과 가정의 그리스도교적 진리의 이상과 실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더 결정적인 것으로 교회의 ‘근접성’에 해당하는 주제입니다. 새로운 부부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유대에 대한 축복은 보다 더 그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을 동반하면서 인간의 나약한 상황에 가까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그들을 복원시켜주고 격려하고 치유할 수 있게 말입니다. 교회와 그 자녀들의 불가해소적인 유대는 충실한 사앙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가장 투명한 표징입니다.

5. 이런 수고의 새로운 지평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대학원을 바라봅니다. 이 대학원은 베드로의 후계자의 사목적 염려에 대한 신앙의 지성적 개방성을 유지하도록 불렸습니다. 연구와 공부라는 임무가 갖고 있는 풍부함은 전체 교회를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정신의 선두에 맡겨졌습니다. 또한 “좋은 신학자들은 좋은 목자들처럼 백성과 길가의 냄새를 풍기며 그들의 숙고를 통해 그들은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준다”(2015년 3월 3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신학과 사목은 함께 갑니다. 복음화라는 목적과 교회의 사목이라는 것에서 나오지 않고 향하지 않도록 하는 신학적인 교의는 교회의 사목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나은 지성과 신앙의 전수를 위한 계시와 전승의 보물을 만들 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임무는 신앙의 기쁨 안에 뿌리 내리고 교회에 대한 기쁜 봉사의 겸손 안에 뿌리내리라고 요구합니다. 교회는 그러한 바이지 어떤 자기 상상과 유사성의 교회가 교회는 아닙니다. 이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살아 있는 교회, 우리가 속해 있는 아름다운 교회, ‘무익한 종들’ (루카 17,10),인 우리를 봉헌하는 유일한 성령과 유일한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무익한 종들은 자신들의 보다 나은 선물들을 봉헌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가 교회를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를 넘어서서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기쁨 속에서 희생을 하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이루는 일치의 길에서 우리를 동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맡겨진 밭에 씨앗을 심을 수 있도록 자비로이 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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