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구체적인 실천은 도움이 필요로하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뵙고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10월 26일 수요 일반알현의 가르침에서 전했다.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운 순례객들에게 마태 복음의 내용 중 나그네를 맞아들이는 것과 헐벗은 이에게 옷을 준다는 것이 현 시대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를 언급하고, 심한 냄새가 나는 난민에게 손을 내민 여성과 난민으로 인해 마음의 변화를 겪은 택시기사의 실화를 전하며 자비의 실천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향기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장벽을 세우는 폐쇄성이 아닌 열린 사회가 인간의 존엄을 되찾고 사회에 평화를 줄 수 있을 것이며 사회의 극한으로 내몰린 이들 역시 헐벗은 이들임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의 즉각적인 응답을 요청하였다.

이하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가르침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언제나 살아있고 역동적이 될 수 있도록 전해주신 구체적인 자비의 활동에 대하여 계속 묵상해 봅시다. 이러한 활동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 최후에 만날 것을 기다리다가 지치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며,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서 그분의 모습을 알아보고 매일 그분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듯이 맞아들였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마태25.35-36) 우리 시대에도 외지인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경제 위기와 무력갈등, 기후변화는 사람들이 떠나도록 만듭니다. 이민자가 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속되어 왔던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잊고 있는 현상이 우리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수많은 사례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자신의 고향을 떠나 다른 땅으로 나아갑니다. ‘네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이스라엘 백성들도 노예살이를 하던 이집트에서 떠나 40년간의 사막에서의 방랑생활 끝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다다릅니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님의 성가정도 헤로데의 위협 때문에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2.14-15) 인간의 역사는 이동의 역사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이동의 현상을 겪어보지 못한 민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기를 지나오면서 사회적 갈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드러내는 위대한 모습들을 목격했습니다. 오늘날의 경제적 위기라는 현상은 닫힌 마음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권하는 슬픈 선택이 우선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벽과 장막을 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 중에 다양한 방법으로 난민들과 이민자들을 돕고 지원하지만 이기심의 목소리에 묻히곤 합니다.  폐쇄성은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범죄에 이용됩니다. 연대만이 유일한 해답이 됩니다. 연대… 이민자들과의 연대… 이방인들과의 연대…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은 예전처럼 지금도 즉각적인 응답을 기다립니다. 지난 세기만 돌아보더라도 동료들과 함께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을 도왔던 프란치스카 카브리니 성인이 보여주신 모범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도움을 필요로하는 이들을 향한 자비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빠져서는 안되는 모두가 해야할 약속입니다. 교구들과 본당들 수도회 그리고 제단체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전쟁과 배고픔과 폭력과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탈출한 형제 자매들을 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라면 커다란 힘이 되어 조국과 가족과 일자리와 존엄을 잃은 이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몇 일전 작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성 한 분이 거리에 있던 어떤 난민에게 다가가 말했습니다. ‘뭔가를 찾고 계시나요?’ 신발도 없던 난민은 ‘저는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가서 자비의 성문을 지나가고 싶습니다.’ 부인은 생각했습니다. ‘신발도 없는데 어떻게 걸어갈 수 있을까?’ 그래서 택시를 불렀습니다. 심한 냄새 때문에 택시기사는 승차거부를 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은 택시에 태워 줬습니다. 여성분은 택시를 같이 탔고 난민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약 10여분간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고통과 전쟁과 배고픔 그리고 자신의 고향에서 왜 떠나와야 했는지를 이야기 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여성분은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지갑을 열었습니다. 냄새가 난다고 승차거부까지 하려고 했던 택시기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인, 아닙니다. 돈을 내야 하는 건 오히려 접니다. 덕분에 제 마음을 감동시킨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이 여자분은 자신도 아르메니아의 후손이었기에 고통받는 이민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행동을 하게 되는 처음에는 조금의 불편함 때문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냄새가 심해…’ 그러나 그 끝은 영혼의 향기를 뿜어내어 우리를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우리가 난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또 다른 행동으로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 있습니다. 존엄을 잃은 이에게 존엄을 되찾아 주라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라는 것일까요? 동시에 거리로 내몰린 희생자인 여성들이나 미성년자들을 포함해 인간의 육체를 상품처럼 취급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요? 일자리가 없거나, 주거할 집이 없거나 기본적인 삶을 유지할 수입이 충분하지 못한 이들, 인종이나 신앙으로 박해받는 이들 모두가 헐벗은 이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닫아버리거나 형제들의 도움의 호소에 무관심해 지거나 자신의 이익만을 염려하는 덫에 갖히지 맙시다. 타인들을 향해 열리게 된다면 삶은 풍요로워지며 사회는 평화를 얻게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심한 냄새가 났던 난민에게 도움을 주셨던 분과 난민으로 인해 영혼이 변화된 택시기사를 잊지 맙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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