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상대방의 필요를 이해하도록 합니다. 특히 이것은 깊은 존중의 표시입니다.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베드로 광장에서 있었던 알현 중에 다음과 같은 강론을 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들었던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요한 4,6-15. 참조). 이 만남이 주는 충격은 여인과 예수님과의 치밀하게 짜인 대화입니다. 오늘 이것은 우리가 자비의 매우 중요한 측면이 대화를 면밀하게 살피도록 합니다.

대화는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상대방의 필요를 이해하도록 합니다. 특히 이것은 깊은 존중의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대화는 사람들이 듣는 태도를 갖도록 하고 대화 상대자의 보다 나은 면을 이해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대화는 애덕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대화는 차이들을 인정하면서도 공동의 선익을 추구하고 공유하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대화는 존중하고 존중받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다른 사람 앞에 서 있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옆에 같이 살아가면서도 형제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우리 위치를 더 높게 평가할 때 말입니다. 정당한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중단시키면서 혹은 잘 듣지 않을 때 우리는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다가 중단시키면서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하고 말합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할 때까지 놔두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화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참된 대화는 침묵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침묵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특별한 선물을 그 형제 속에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대화한다는 것은 관계를 인간적으로 만들고 몰이해를 극복하게 도와줍니다. 우리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까. 서로가 들어주는 것을 배웠다면 문제들을 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과 부인, 부모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도 말입니다. 스승들과 학생들 사이에 대화는 얼마나 많은 도움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일에 대한 보다 나은 요구들을 발견하기 위해서도 지도자들과 회사원들 사이에서 대화는 얼마나 많은 도움을 가져오겠습니까.

교회도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요청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선을 실현하는데 기여하기 위하여 모든 시대의 남녀 인간들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보존해야 할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한 책임성과 창조의 위대한 선물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중심이 되는 대화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그 사명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고 평화와 상호 형제적 존중의 조직망을 형성하기 위하여 종교들 간의 대화를 생각해 봅니다(찬미 받으소서, 201. 참조).

결론적으로 모든 형태의 대화는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요청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적인 일을 위하여 협력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며 모든 이 안에 선의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대화는 분열과 몰이해의 장벽을 허물어 버립니다. 대화는 통교의 다리를 만들고 조그마한 자신 안에 살아가면 혼자가 되지 않게 합니다. 대화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온유하게 말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렇게 될 때 가정과 동네, 그리고 모든 것이 보다 나아지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가 말하도록 두지 않고 소리 지르기 시작한다면-오늘날 너무 많은 소리 지르고 있지 않습니까-우리 사이에 관계는 좋은 결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남편과 부인,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관계의 끝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듣고 설명하고 남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서 소리 지르지 말고 온순하게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여인은 큰 죄인이었습니다. 비록 주님께서 그녀가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셨고   끝까지 이야기하도록 놔두시면서 조금씩 그 삶의 신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유요합니다.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자비의 표징들을 성장시킬 수 있고 수용과 존중의 도구들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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