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온적인 마음은 게으른 삶속에 갇혀 앉아서 사랑의 불꽃을 꺼버립니다. 마음이 미온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편안함만을 충족시키면서 생활합니다.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에 도착하여 사목 방문의 첫 일정으로 바쿠에 있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면서 강론을 행했다. 그리고 교황은 미사를 마치면서 예정에 없던 간단한 연설을 신자들에게 했는데 소수에 불과한 신자들을 찾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령께서 예루살렘의 작은 공동체에 하셨던 것을 닮고자 한다는 간단한 말을 남겼다. 다음은 강론과 짦은 연설이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신앙과 봉사입니다. 신앙에 관해서는 두 개의 특별한 요청이 주님과 관계됩니다.

첫 번째 요구는 하바쿡 예언자의 요청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인간들이 욕구 충족을 위해서 분쟁과 폭력을 행함으로써 파괴된 평화와 정의를 다시 세워주실 것을 간절히 청합니다. 예언자는 “주님,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 제가 언제까지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까?”(하바 1,2)라고 청합니다. 하느님은 응답을 하시면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시어 강력한 방법으로 상황을 해결하시지 않으시고 힘을 통해 당신 현존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은 희망을 잃지 않고 인내롭게 기다리도록 초대하십니다. 특별히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신앙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신앙(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 참조).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그분은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즉시 변화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램에 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마음을,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계속해서 치유하시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시면서 세상을 바꾸십니다. 이것은 우리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에 들어 오실 수 있도록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어줄 것을 원하십니다. 그분께 대한 이 개방성은, 그분께 대한 이 신뢰는 바로 ”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1요한 5,4)라는 말씀대로 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열려져 있고 믿음을 가진 마음을 발견하시면 거기에서 엄청난 일을 완수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갖는 것,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요청인 것인데 복음에서 사도들이 주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6). 이것은 매우 좋은 요청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하느님의 응답은 놀랍게도 요청하는 것을 뒤집으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하고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항상 구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 편에서 그것을 항상 가꾸어야 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마술적 힘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에 주어지는 ‘지참금’도 아닙니다. 더욱이 그것은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필요한 초자연적인 힘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우리의 요구들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기적인 신앙이고 우리 자신이 중심이 되는 신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마음의 위로를 받아 마음의 평화를 지니면서 편안하게 사는 것이거나 혹은 걱정 없이 지내는 것과 혼동되고 맙니다. 신앙은 주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금실과 같습니다. 신앙은 그분과 일치되어 함께 있는 순수한 기쁨입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보다 더 값진 선물이고 만일 우리가 신앙을 온전히 간직할 때 그것은 열매를 가져다 줍니다.

우리편에서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은 봉사라는 것을 이해시키십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신앙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신 다음 즉시 봉사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과 봉사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고 서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하기 위해 저는 아주 친근한, 양탄자의 모습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양탄자는 예술품의 일종인데 그 역사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 생활도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으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창조와 역사에 있어서 걸작을 이룩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양탄자는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신 것처럼 실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잘 짜여져야 아름답고 잘 만들어진 양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이 생활은 매일 인내를 통해서 잘 짜여지고 실들이 잘 엮어져서 서로 잘 짜여져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실과 봉사라는 천으로 말입니다. 봉사가 신앙에 결합되면 마음이 젊고 열려집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려고 박동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듯이 신앙은 강력하게 변화되어 엄청난 일들을 이룩합니다. 봉사에 항상 결합되어 이런 길을 걸어갈 때 신앙은 성숙하게 되고 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사는 무엇입니까? 봉사는 오직 고유한 의무에 충실하거나 어떤 선행을 이룩하는데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아주 강하고 근본적인 말씀으로 완전하게 내어주는 삶, 헌신적인 삶, 아무런 계산이나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완전히 내어주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왜 이렇게 요구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끝까지”(요한 13,1), 우리의 종이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기 목숨을 바치러”(마르 10,45)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체 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이룩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가 그분께 봉사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 그리고 우리의 공로를 넘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봉사하십니다. 그분은 당신 생명 자체를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따르도록 초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 26).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한 봉사를 하도록 불리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이되신 하느님을 본받기 위해서 불리운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봉사를 살아가도록 불리웠습니다. 봉사는 그러므로 삶의 방식인 것이며 그리스도교 삶의 방식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봉사는 기도와 흠숭을 통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 열린 마음으로 헌신하려고 내어준 삶,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공동선을 위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봉사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서 아무런 봉사를 하지 않는 인생으로 만드는 유혹을 신자들도 경험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두 가지를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미온적인 마음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미온적인 마음은 게으른 삶속에 갇혀 앉아서 사랑의 불꽃을 꺼버립니다. 마음이 미온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의 편안함만을 충족시키면서 생활합니다. 이 욕구 충족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는 점점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삶에 만족하면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미온적 인간은 자기 마음과 시간의 몇 ‘퍼센트’만을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내어줍니다만 절대로 그 이상은 보다 더 내어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저는 신앙에 있어서 여러분을 앞선 분들의 모범을 바라보는 여러분은 마음을 그렇게 미온적으로 버려두지는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전체 교회는 여러분에게 특별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러분을 바라보고 격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눈에 아주 값진 작은 양 떼이기 때문입니다.

빠질 수 있는 두 번째 유혹은 수동적이어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행동’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 유혹은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오직 무엇인가 되어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제 봉사는 목적이 아닌 도구로 전락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목적은 특권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권력이 오고 그 다음은 고위층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상기시키시는 것인데-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Mt 20,26). 이러는 가운데 교회가 건설되고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양탄자의 예를 들어 여러분의 아름다운 공동체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명주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실들이 서로 잘 짜여질 때 다양한 실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봉사하지 못합니다. 항상 일치하십시오, 항상 사랑과 기쁨 속에서 겸손하게 살아가십시오. 다양함 속에서 조화를 창조하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성인들, 특히 켈커타의 성녀 데레사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성녀 데레사의 신앙과 봉사의 열매는 여러분 가운데 현존하고 있습니다. 오늘 메시지를 요약해 주는 성녀의 아름다운 말씀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신앙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미사를 마치며 교황이 행한 짦은 연설

어떤 사람은 교황이 많은 시간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200만 명 가운데 700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를 방문하기 위해서 긴 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이는 아제르바이잔 언어를, 어떤 이는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기에 일률적인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주변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교황은 성령을 본받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서 다락방에 있던 주변적인 작은 공동체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공동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보잘것 없음을 체험하면서 박해를 당하고 버림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공동체에 용기와 힘을 주시고 앞으로 나아가 예수님의 이름을 선포하여 증거하는 자유를 주십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문은 두려움이나 수줍음으로 닫혀 있었으나 성령의 힘으로 그 문을 열어 재치고 박으로 나갑니다. 그 당시 성령께서 시간을 잃었다고 여겨졌던 것처럼 교황도 시간을 잃어 버리고자 합니다.

오직 두 가지만이 필요합니다. 그 공동체에는 성모님이 계셨습니다. 성모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 공동체에는 사랑이,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형제적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말고 앞으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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