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시선은 잘못을 넘어서서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과거의 죄악에 멈추지 않으시고 미래의 선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청년 대회에 참가한 젊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다음과 같은 강론을 했다.

예수님의 시선은 잘못을 넘어서서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과거의 죄악에 멈추지 않으시고 미래의 선을 바라보십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크라쿠프에에 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리코에서 예수님과 자캐오라는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루카 19,1-10). 거기서 예수님은 단지 설교하시거나 몇몇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복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도시를 지나 다니셨습니다(1절 참조). 예수님은 달리 말하자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 가까이 가시고자 하셨고 그래서 우리 여정의 깊은 내면까지 함께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명과 우리 생명이 참으로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세관장’, 그러니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인 자캐오와의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자캐오는 그런 관점에서 미움의 대상이던 로마 식민 정책의 부유한 협력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갈취하는 사람이었고 그에 대한 나쁜 소문 때문에 스승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갈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만남은 그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일은 그때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몇 가지 장애에 부딪힙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장애를 대면해야 했습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선 작은 키가 문제였습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스승을 볼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비천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거리감을 느끼는 위험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유혹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1요한 3, 1)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모상을 따라서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음은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생활하시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살도록 불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고함’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의 사랑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러니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기쁘게 살지 않는 것,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선으로 나를 감싸고자 하시는데 나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꺼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그 어떤 죄도 허물이나 실수도 그분의 생각을 바꾸지 못 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 누구도 비천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무의미한 존재로 여지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중요한 사람들이고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당신은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인 바 그대로 당신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 때문에 당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눈앞에서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은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당신이 유행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분의 눈에는 당신의 가치는 무한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높이 올려지기보다 낮아지는 경우가 발생하곤 합니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항상 끈질기게 충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신뢰하고 있는 것보다 더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열병에 걸린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이 높은 분”이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를 희망 속에서 기다리십니다. 비록 우리가 슬픔 속에 빠져있고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 속에 뒤죽박죽되어 있어도 말입니다.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영적 지고함에 합당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이것은 바이러스입니다. 슬픔 속에 머무는 것은 일종의 바이러스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전염시키고 모든 것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걸게 만들고 생활을 개선하여 다시 시작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반대로 끈질기기 희망을 주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기쁜 없이 그렇게 꺼져가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기쁨이 없는 청년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이것을 기억합시다. 매일 아침 ‘주님, 저를 사랑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제 인생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개선되어야 할 내 잘못들이 아니라 인생, 위대한 선물인 인생에 대해서 말입니다. 인생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는 시간인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는데 두 번째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중풍병적인 수치심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자캐오가 무화과나무 위로 오르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심한 내적인 투쟁을 했었을 것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궁금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한편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공적인 인물이었고 세관장이었으며 권력을 지닌, 그러나 미움이 대상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무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모두의 눈에 우습게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극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활동이 더 강렬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했을 것입니다만,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끌릴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말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은 자캐오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실 수 있는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그 마음속에 이런 비슷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불행과 죄악의 모래밭에서 자신을 끄집어 내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병적인 수치심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자캐오는-복음이 말하는 것처럼-“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 다음 예수님이 부르실 때 “얼른 내려왔기” 때문입니다(4. 6절).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서랍 속에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에서 궁금증을 꺼버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면서 말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손을 붙들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분께 막연한 생각이나 단순한 ‘문자 메시지’ 정도를 보내면서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그분께 잘못, 허약함, 특히 고해성사를 받으면서 죄, 고생스러움 모든 것을 가지고 가는데 있어서 수치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용서와 평화로써 여러분을 놀라게 하실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는데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온순하게 따라나서십시오. 영혼을 마비시키지 마십시오. 오히려 아름다운 사랑에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이 사랑은 포기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자신의 편리함과 단지 자기만을 생각하는 마약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마약에 ‘아니’라고 말하도록 합니다.

작은 키, 그리고 중풍병적인 수치심 다음에 자캐오가 대면해야 했던 장애는 더 이상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군거리는 군중이 바로 그것입니다. 처음에 그를 막았고 그다음에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리고 “자비로 가득하신 하느님”(에페 2, 4)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하느님은 여러분에게서 멀리 계시고 무섭고 여러분에게 무관심하고 착한 사람들에게 선하시고 나쁜 사람들은 나쁘게 대하신다고 여러분이 믿도록 하면서 여러분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 하느님은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마태 5,45)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기를 갖도록 초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모두를 사랑하는 사랑으로 악보다 더 강하게 되도록 초대하십니다. 겸손하고 양순한 자비의 힘을 믿는 여러분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 7)의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새로운 인류를 기대하고 사람들 사이에 미움을 거부하고 장벽이 되고 있는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서면서도 이기주의와 분노함이 없이 고유한 관습을 보존하기 때문에 꿈쟁이들이라고 판단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미소, 여러분의 열려진 팔로 희망를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유일한 인류 가족을 위한 축복이 되어 선을 사람들에게 비추어 주십시오!

그때 그 군중은 자캐오를 높은 데서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반대로 당신의 시선을 그를 향해 던지셨습니다(5절 참조) 예수님의 시선은 잘못을 넘어서서 갑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과거의 죄악에 멈추지 않으시고 미래의 선을 바라보십니다. 폐쇄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일치와 친교의 길을 추구하시면서 모든 이들 가운데서 겉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바라보십니다. 당신의 마음과 저의 마음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시선으로 여러분은 다른 인류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 대해서 ‘훌륭하다’라는 말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선 자체를 위해서 노력하고 깨끗한 마음을 보존하고 정의와 솔직함을 위해서 평화로이 투쟁하면서 행복해하십시오. 외형적인 것에 머물지 마십시오. 보여주기 위한 일들을 믿지 마십시오. 보다 나은 사람들로 보이기 위해서 영혼에 화장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치지 말고 선을 바라보고 전달하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인 그 기쁨을 거저 전달하십시오(마태 10,8 참조).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으로부터 그것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캐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 5). 얼른 내려오너라. 왜냐하면 오늘 나는 너와 함께 있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네 마음의 문을 열어라. 예수님은 당신에게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세계 청년 대회는 오늘 계속해서, 그리고 내일도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아름다운 도시나 아름다운 기억 속에만 머물고자 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집에 매일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자 하십니다. 공부, 직업생활, 친구, 사랑, 계획, 꿈.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기도 속에 가져오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만남들, 그리고 하루 일정 속에서 기도의 연결 고리들이 첫 자리를 차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이 매일 울려퍼지고 당신의 복음이 여러분의 복음이 되고 인생의 길에서 일종의 ‘네비게이션’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집에 가기를 원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캐오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예수님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자캐오란 이름은 전례에서 울려 퍼졌던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줍니다. 하느님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십시오. 하느님의 기억은 단순한 ‘하드 디스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기록을 보존하고 있는 디스크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분의 기억은 자상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악의 흔적을 결정적으로 지워버리면서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그 성실한 기억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 몇 일 동안 받은 좋은 것들을 보존하면서 말입니다. 침묵 가운데 이 만남에 대한 기억을 되새깁시다.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며 우리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되 살려봅시다. 기억을 떠올리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만나주셨던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침묵의 기도를 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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