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가난과 자비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있었던 알현에서 가난과 자비에 대하여 루카복음 16장 19-31절의 성서말씀을 통해 함께 묵상하고 가르침을 전달하였다.

교황은 가난한 이들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을 만나러 오시는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가 마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자비로운 실천을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하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가르침 내용 전문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의 삶은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습니다. 삶의 조건은 정반대이며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잣집 대문은 밖에서 머물며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고 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늘 닫혀있습니다.  부자는 사치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만 라자로는  종기로 뒤덮여 있습니다. 부자가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동안 라자로는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오직 개들만이 그를 돌보며 종기를 핥았습니다. 이 장면은 사람의 아들께서 최후의 심판에서 선포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다.’(마태 25.42-43) 라자로는 모든 시대의 가난한 이들의 침묵의 외침과 소수인들에게 부와 자원이 몰려있는 세상의 모순을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어느날 죽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는 같은 운명을 맞이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외없이 이 길을 갑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다가갑니다. (24,27절)   그런 후 자신이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 중 하나임을 밝힙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을 향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자신이 모든 것이 중심이 된 삶을 살며 자신의 풍요와 낭비의 삶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라자로를 소외시키고, 주님에 대한 관심도, 율법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시는 하느님을 경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야 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무시는 하느님에 대한 경시입니다! 비유에서 특이하게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이 그냥 부자로 불리지만 가난한 이의 이름은 다섯번이나 반복됩니다. ‘라자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입니다. 문 앞에서 머물던 라자로는 부자가 하느님을 기억하도록 해주는 살아있는 부르심이었지만 부자는 이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고통을 받게 된 것은 자신의 부 때문이 아니라 라자로에 대한 자비심을 느끼지 못하고 그를 구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두 번째 부분은 라자로와 부자가 죽은 다음의 이야기 입니다.(23-31절) 저세상에서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데려가고 부자는 저승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가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습니다.’(23절) 라자로를 처음으로 본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말은 다르게 표현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부자는 살아있는 동안 못 본 척했던 라자로를 이제야 알아보고 도움을 청합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을 못본척 합니까. 자신의 식탁에서 남은 음식이 없다고 거부하였으나 이제는 마실 것을 가져다 달라고 합니다! 아직도 예전의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자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요청을 들어 줄 수 없음을 밝히며 아브라함이 직접 이야기의 핵심을 알려줍니다. 아브라함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지상에서의 불의에 대한 보상이며, 부자와 가난한 이의 삶을 갈라놓았던 문이 ‘커다란 구렁’으로 변해 버렸음을 설명해 줍니다. 라자로가 그의 집 아래에 머물 땐 부자가 문을 열어 라자로를 도와주어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제는 두사람 모두 죽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이상 바뀔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원인을 직접 언급하시지 않지만 비유에서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이웃들에게 보이는 자비와 관련이 있습니다. 자비가 부족할 때, 우리가 마음 안에 갇혀 만남을 위한 공간이 없어지게 되고, 들어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향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닫혀 있을 때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며 이는 불행한 일이 됩니다.

이 순간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을 생각하고 그들도 역시 같은 최후를 맞게 될 위험이 있음을 깨닫게 되어 라자로에게 세상으로 돌아가 경고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합니다. 우리의 회개를 위해 놀라운 사건을 기다리지 말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 말씀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메마른 마음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건조한 곳을 어루만져 줍니다. 부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도록 하지 않았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에 눈을 들어 볼 수 없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할 메시지도 메시지를 전달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예수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에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자비로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신다는 숨겨진 우리 구원의 신비가 비유 말씀을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말씀을 들으며 우리 모두는 지상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성모님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감사합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