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느님의 자비는 보상의 논리가 아닌 자애로운 사랑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11일 수요일 오전 성 베드로 광장에서의 일반 알현을 통해 순례객들과 방문객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으며 끝없이 기다려 주시며 당신의 자녀라는 존엄한 신분을 주셨다면서 하느님의 마음같은 자비심을 지니라고 언급하였다. 궂은 날씨로 인해 몸이 불편한 이들은 비가 올 것에 대비해 바오로 6세 홀에서 대형스크린을 통해 알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교황은 루카 복음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함께 묵상하며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이 어떤 모습이어도 자비로움으로 기다리고 맞아주며 사랑으로 기쁨을 표현한다는 것을 밝혔다. 하느님의 자비는 행동한 만큼의 보상으로 설명되는 논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자신이 정의롭고 아버지의 집에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보상을 바라며 하는 행동이라면 역시 자비가 필요한 이들이라면서 하느님의 자비는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교황은 알현에서의 가르침을 마치며 모두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 나라의 자비와 우애의 잔치에 동참하며 그분의 마음을 따라 살기를 권고하였다.

이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반 알현의 가르침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알현은 두 곳에서 준비되었습니다. 비가 올 것을 염려하여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바오로 6세 홀에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참여하시도록 했습니다. 장소는 두 곳이어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6세 홀에 계신 몸이 불편하신 분들께 인사를 합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루카 15.11-32)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비유의 말씀에는 아버지와 두 아들이 등장하며, 말씀으로 하느님의 끝없으신 자비를 알려줍니다.

마지막 부분부터 시작해 봅시다. 다시 말해 아버지 마음의 기쁨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23-24절) 이 말씀을 통해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이야기를 중단 시키십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19절) 하지만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견딜 수 없어, 서둘러 존엄의 표징인 가장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아들에게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망하고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으로 표현하지 않으십니다. ‘다시 다 갚아!’라는 말을 아들에게 하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사랑으로 기다려주고, 두 팔을 벌려 안아주십니다. 아버지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유일한 걱정은 아들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행복한가 하는 것이었으며, 축제를 열어줍니다. 떠나갔던 아들이 돌아온 순간은 감동적입니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20절) 얼마나 큰 자애로운 사랑인지요! 멀리서부터 아들을 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버지는 옥상에 올라 혹시나 아들이 돌아올까 길을 계속 바라보고 계셨던 겁니다. 아들은 마음대로 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아버지의 자애로운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아버지의 자비로움은 조건 없이 넘쳐 흐릅니다. 아들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그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아들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18-19절 참조) 이 말은 아버지의 용서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아빠의 포옹과 입맞춤은 어떤 장애에도 늘 아들로 여기고 있었음을 이해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이 가르침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조건은 아버지 하느님 마음의 사랑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거나 공덕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악마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존엄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절대 절망하지 않게 생기를 돋우어 주십니다. 자식들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 위험한 곳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걱정하는 엄마들과 아버지들을 생각합니다. 본당 신부님과 교리교사들이 자신이 하는 일들이 헛 일은 아닌지 자문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으로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되었는지, 자비와 용서에 목마른 이들과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들, 교도소에 있거나 인생이 끝나버린 것만 같은 사람들도 생각해 봅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포기하지 않도록,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귀환을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가장 볼썽사나운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하시며 나를 기다려 주십니다.

비유 말씀에는 다른 아들이 등장합니다. 아버지의 자비심을 발견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큰 아들입니다. 그는 언제나 집에 머물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너무 다릅니다! 그의 언사에는 자애로움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당신(아버지)을 섬기며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이제 저 아들이 오니.!’(29-30절 참조) 무례합니다.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며 ‘형제’라 부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늘 함께 지내고 섬겼음을 우쭐댑니다. 그럼에도 함께 있음을 기쁨으로 산 적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축제를 하도록 염소 한 마리 준 적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불쌍한 아버지! 한 아들은 집을 나가 버렸고 다른 아들은 진정으로 함께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고통은 우리가 멀어질 때나 떠나갈 때 혹은 같이 있어도 진정 가까운 이가 되지 못할 때 느끼시는 하느님의 고통이며 예수님의 고통입니다.

큰 아들 또한 자비가 필요합니다. 정의로운 이들은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믿지만 이들 역시 자비가 필요합니다. 이 아들은 나중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열심히 일할 가치가 있는지 자문하는 우리 모습을 대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것이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을 갖는 자녀로서의 존엄을 가지기 위한 것임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하느님과 ‘흥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 놓으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참조) 아버지께서는 큰아들에게 이와 같이 이야기 합니다. 그분의 논리는 자비심인 겁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의 봉사에 대한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두사람 다 예수님의 놀라운 논리에 따라 설명됩니다. 잘 한다면 상을 받을 것이고 잘못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논리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논리는 역전됩니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2절)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았고 동생을 다시 얻게 됩니다! 작은 아들이 없다면 큰아들도 ‘형제’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더 큰 것은 자신의 아들들이 형제임을 서로 알게 되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거나 거부하도록 결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소망과 삶의 관점을 자문해야만 합니다. 비유의 말씀은 미결의 상태로 남습니다. 큰아들이 어떤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극이 됩니다. 이 복음 말씀은 우리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자비와 형제애의 축제에서 그분의 기쁨에 동창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이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엽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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