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5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있었던 일반 알현에서 착한 목자의 자비심과 잃어버린 양에 대한 루카복음의 성서 말씀을 나누며 착한 목자처럼 아무도 포기하지 말고 길 잃은 이를 찾아나서야 한다고 순례객들과 방문객들에게 권하였다.  

교황은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어느 것도 마지막까지, 자비심으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언급하며 선교 정신으로 모두를 찾아 나서자고 권유하였다.

교황의 일반 알현 가르침

(관련 복음 루카복음 15장 4-6절: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있는 착한 목자의 그림을 우리 모두는 압니다. 이 그림은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과 어느 누구도 잃지 않으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당신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것에 눈살을 찌푸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 입니다. 비유에서 죄인들은 예수님 가까이로 다가와 말씀을 귀 기울여 듣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유 삼아 멀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가까이 하시자 멀어진 것 입니다. 이들은 긍지가 높고 오만하였으며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믿었습니다.

성서 말씀은 세 종류의 등장인물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목자와 잃어버린 양과 나머지 양떼 입니다. 실질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목자이며 양들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목자가 유일하며 진정한 주인공이고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비유 말씀 중에 질문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4절) 목자의 행동을 생각하게 만드는 역설이라 할 것입니다. 한마리의 양을 위해 아흔 아홉마리의 양을 내버려두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더군다나 안전한 우리 안도 아닌 사막에서 말입니다. 성서적 전통에 따르면 사막이란 곳은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찾기 힘들고 보호받지 못하며 맹수와 도적들이 있는 죽음의 땅 입니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역설은 목자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5-6절)  그러므로, 목자는 사막으로 돌아가 모든 양떼를 찾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돌보느라 아흔 아홉 마리는 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르침은 한 마리의 양도 잃을 수 없다는 것 입니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도 길을 잃도록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활동은 잃어버린 아들들을 찾아, 다시 찾은 기쁨을 모두와 함께 즐기는 것 입니다. 억제할 수 없는 소망입니다. 아흔 아홉마리의 양도 목자를 멈추게 할 수도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할 수도 없었습니다. 목자는 핑계를 찾을 수 있었을 것 입니다. ‘하지만 잘 계산해 봐야해. 나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이 있고 한마리만 잃어버렸어. 큰 손실도 아니잖아?’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것은 한마리 한마리가 그에게 소중하였기 때문이며. 그 양은 자신을 가장 필요로 하고, 가장 소외받고 가장 무시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찾으러 갑니다. 죄인들을 위한 자비는 하느님의 활동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자비는 온전히 충직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그분의 구원의지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버리는 문화를 알지 못하십니다.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 문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모두를 찾으십니다…. 모두를요! 한사람 한사람 찾으십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이 사랑이시고 자비이시기에 사람을 버린다는 표현을 모르십니다.

주님의 양떼는 언제나 길을 갑니다. 주님을 소유하려 하거나, 인간적인 목적이나 규정으로 서두르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목자께서 잃어버린 양이 있는 곳에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곳에서 그분을 찾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만나야 한다고 정해 놓은 곳이 아닙니다. 자비로운 목자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양떼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동안 목자께서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에게 양떼가 다시 모이도록 동참하라고 부추기십니다. 그렇기에 어깨에 메고 있는 양 뿐만 아니라 모든 양떼가 목자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 ‘친구와 이웃’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여러차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공동체 안에는 누군가가 자리를 비워 빈 공간을 만들어놓기 때문입니다. 낙담한 이 사람이 어쩔수 없이 잃어버린 사람이라 믿기도 하고 더이상 치유할 방법이 없는 환자라 여깁니다. 이렇게 된다면 더이상 양떼의 냄새 대신 갇힌 곳의 악취를 풍기는 우리 안으로 우리를 가두어 놓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취를 풍기도록 가두어 두어서는 안됩니다. 절대!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는 곳에서, 작은 공동체에서, 본당에서, 자신을 정의롭다 여기는 것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이들을 만나도록 해주는 선교의 원동력이 없는 곳에서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시야에는 영원히 잃어버린 양은 없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어느 누구도 영원히 잃어버린 이가 없습니다. 절대!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착한 도둑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시각에선 영원히 잃어버린 이는 없으며 오직 다시 찾아낼 양들만이 있습니다. 나아간다라는 사고방식은 역동적이고 열려있으며 활동적이고 창조적입니다. 형제애를 위한 길을 시작할 수 있도록 나아가서 찾읍시다. 어느 누구도 목자에게서 멀어져서는 안됩니다. 어떤 양떼들도 자신의 형제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잃어버린 이를 찾는 것은 목자와 하느님의 기쁨이며 모든 양떼들의 기쁨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다시 찾은 양들이며 주님의 자비로 함께 모였고, 그분과 함께 모두가 기뻐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