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월과 묵주기도


성모성월과 묵주기도

천주교회는 하느님에게는 흠숭을, 성모 마리아에게는 특별한 공경을 드리고 있으며 해마다 5월을 ‘성모성월’로 정해서 신자들이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과 함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보다 더 다지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당에서는 성모성월에 성모의 밤을 비롯해서 다양한 신심 행위들을 거행하기도 한다. 그것 가운데 가장 대중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교회의 신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묵주기도는 어쩌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기도 중에 하나일 것이다. 성모성월에 신자들이 보다 자주, 보다 더 깊이 묵주기도의 신비들을 묵상하면서 복음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묵주기도와 더 친근해지길 교회는 기대한다.

효과적인 영적 무기로서 묵주기도와 그 관상적 차원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은 1963년 7월 13일에 가진 일반 알현에서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교회의 신심(la dévotion de l’Eglise)”이라고 정의 내렸고 이 기도는 “대중적 특성(le caractère populaire)”과 “그리스도 중심적 정신(l'esprit  christocentrique)”, 그리고 성모님께 매달리는 “자녀다운 신심(la filiale dévotion)”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물론 선대의 여러 교황들도 이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에게 자주 바칠 것을 권고했었다. 특히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 「최고 사도직」(Supremi Apostolatus Officio-1883.9.1)을 통해 묵주기도가 사회악을 물리치는 효과적인 영적 무기라고 소개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단순하게 구성된 이 기도가 지닌 관상적 차원을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바친다면  그것은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복자 바오로 6세 교황은 묵주기도가 지닌 그 관상적 특성을 살리면서 기도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로사리오 기도에서, 찬미와 간구의 요소 외에도 더욱 본질적인 요소인 관상의 중요성이 시급히 요청되어왔습니다. 관상의 요소가 없는 로사리오 기도는 영혼이 없는 육체에 불과하며 기도문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게 될 위험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마태 6,7)고 하신 예수님의 권고 말씀을 거스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그 본질상 고요한 리듬과 지속성을 요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일생의 신비를,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셨던 분의 마음으로 묵상할 수 있게 되며 그 무궁한 풍요성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교황 바오로 6세, 「마리아 공경」(Marialis Cultus)-사도적 권고, 47항).

관상의 전통 속에 자리하고 있는 묵주기도와 관상의 모범으로서 성모 마리아

묵주기도가 지닌 관상적 차원을 생각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묵주기도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그리스도교 관상의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묵주기도는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방 세계에서 생겨나 발전한 이 기도는 전형적인 묵상기도이며, 어느 정도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토양에서 피어난 ‘마음 기도’나 ‘예수님 기도’에 해당합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사도적 서한, 5항).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그리스도를 관상함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모범으로서 성모님을 소개했다: “그리스도 관상에서 성모님께서는 그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탁월한 모범을 보여 주십니다. 성자의 얼굴은 특별히 성모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의 태중에서 자라시면서 인간적으로 그분과 닮은 외모를 물려받으셨는데, 이 닮음은 한층 더 돈독한 영적인 결합도 이끌어 냅니다. 그 누구도 성모님만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던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사도적 서한, 10항).

전대사와 묵주기도

교회는 묵주기도가 지닌 이러한 관상적 특성과 그 영적 유익성을 고려해서 대사 규정에 따라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에게 교회의 선익을 나누어 주고자 한다. 대사(大赦)란  “이미 그 죄과에 대해서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일시적 벌(잠벌)을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것으로서, 신자가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켜 교회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나 죽은 이들을 위하여 얻을 수 있다. 교회는 구원의 분배자로서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의 보고를 나누어 준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 312항). 대사 편람(Enchiridion Indulgentiarum)에 따르면 대사에는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벌 전체를 면제해 주면 전대사와 그것의 일부분을 면제해 주는 부분 대사로 구분되며 이것을 구하는 신자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죽은 영혼을 위해서 얻을 수 있다(대사편람 규범, 2-3항 참조).

그리고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소죄도 피하겠다는 의지 외에도 지정된 선행이나 신심 행위와 세 가지 조건, 다시 말해서 고해성사, 영성체, 교황의 지향에 따른 기도를 바쳐야 한다(대사 편람, 규범  20항 참조).

교회는 일정한 조건에 따라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에게 대사를 나누어 준다. 우선 신자가 묵주기도를 성당이나 경당, 가정, 수도 공동체, 신자들의 단체, 좋은 목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모여서 신심을 다해서 바치면 전대사를 얻을 수 있다. 또한 교황이 주재하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 라디오나 텔레비젼으로 전송되는 것을 따라서 함께 할 때에도 전대사가 주어진다. 그러나 첫째 한 신비에 속하는 다섯 단의 묵주기도를 끊어지지 않게 기도해야 하고 둘째로는 각 신비들에 대해서 신심 어린 묵상을 하면서 소리 내어 기도해야 한다. 공적으로 바칠 때에는 지역에서 인준된 관습에 따라서 각 신비들이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하고 개인적으로 바칠 때에는 소리 내어 바치면서 신비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대사 편람, 수여록 17항 참조).

많은 저술가들은 묵주기도의 관상적 특성을 살리려고 자신들의 묵상과 관상의 내용을 기록하여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곤 하였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직접 자신이 묵주기도의 각 신비에 대한 묵상의 내용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강론이나 연설 등에 그 각 신비와 관계되는 내용들이 존재하고 그래서 일부 저자들은 그것들을 발췌하여 나름대로 묵주기도의 신비에 배열하였다. 저자 알렉산드로 사라코는 이런 방식으로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바치는 묵주기도’를 발간하였다. 신자들이 이것을 따라서 묵주기도를 바친다면 그 깊은 관상의 차원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다음은 알렉산드로 사르코의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바치는 묵주기도’의 내용이다.

 

영광의 신비 (주일과 수요일)

1단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묵상합시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와서 그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을 보아라.  [...]”(마태 28, 1-2. 5-7).

인생을 바꾸는 사건

여인들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난 것입니다. 무덤에 다가간 일은 그저 단순한 행동, 그러나 사랑으로 이룬 작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일은 인생을 정말 바꾸는 사건, 일로 변화됩니다. 여인들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인류 역사의 삶에서도 이제 그 전과 같은 상태가 아닌 무엇인가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은 자가 아니라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그냥 이 지상 생명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 자체이시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민수 14,21-28 참조).  예수님은 그저 과거의 인물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현재 살아계시고 미래를 주관하시며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새로움이 여인들과 제자들, 그리고 우리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이것은 죄와 죽음과 악, 그리고 생명을 반대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승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삶 속에 들어가시도록 그분을 친구처럼 신뢰를 갖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분이 당신과 가까이하시고 함께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찾고 있는 평화와 그분이 원하시는 삶을 살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30일 부활성야 미사 강론).

2단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을 묵상합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 50-52).

성부 곁으로 오르신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의 지상 생활은 그 승천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승천하심으로써 그분은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어 그 오른 편에 앉으십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인생길에서 위로로 가득한 실재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합니다. 참된 인간이시며 참된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성은 하느님께로 들어 올려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등산할 때 맨 앞서 산에 오르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용감한 인도자처럼 우리를 당신 자신에게 이끄시고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그분께 맡겨드린다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내어 맡긴다면 우리 구세주이시며 우리 변호자신 분의 손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그분의 부재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우리는 인생에 있어서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다려주시고 변호해 주시는 변호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4월 17일 일반알현).

3단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을 묵상합시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 1-4).

선교의 영혼이신 성령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에 이루어주신 성령의 강림을 관상합시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최후 만찬 장)을 가득채운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성령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에 우리가 들어가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일종의 인지적 교회의 위험과 틀 속에 갖혀 있으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교회의 위험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서 복음의 새로운 생명을 전하고 증거하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신앙의 기쁨을 전달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선교의 영혼이십니다. 성령은 세상의 길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달리도록 용기를 주시는 ‘위로자’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선포하기 위한 머나먼 경계선을 넘어서는 지평을 열어주시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촉구하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5월 19일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 강론).

4단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늘에 불러올리심을 묵상합시다.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묵시 12, 1).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마리아

묵시록의 이야기는 여인과 용과의 싸움에 대한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를 표상하는 여인은 영광스럽게 승리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 아직 고통에 차 있습니다. 사실 교회도 이렇습니다. 교회는 이미 승천하신 주님의 영광에 결합되어 있지만 역사 속에서 아직도 하느님과 영원한 원수인 악마와의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을 가져오는 고통과 도전을 계속해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면해야 하는 이 투쟁에서 마리아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시고 교회의 어머니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길을 걸어가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와 함께 길을 걸으시며 우리와 함께 싸워주시고 악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십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8월 15일 강론).

5단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천상 모후의 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 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에페 1, 3-4).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되는 것

하느님의 마음속에 있는 나자렛의 동정녀의 신비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분은 저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있지 않고 우리는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모든 남녀 인간 한 사람에 대해서 사랑스러운 당신의 시선을 건네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스러운 시선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라고 확고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또한 항상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이 사랑의 계획은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갈 때마다, 특히 성사 안에서 새롭게 되는 사랑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원죄 없이 잉태되시어 참으로 아름다우신  우리 성모님을 관상하면서 우리의 보다 참된 인생의 도착점과 보다 심오한 우리의 소명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름다움으로 사랑받고 변화되어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도록 해 드립시다. 왜냐하면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아주 많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데 있어서 보다 더 용기 있는 자들이 되고 보다 겸손한 사람들이 되는 것을 배우기 위해 그분의 시선에 우리를 맡겨드립시다. 또한 그 아들 예수님의 사랑스런 두 팔과 생명과 희망과 평화를 주는 품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를 그분의 시선에 맡겨드립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12월 8일 삼종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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