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본성이 무한하고 위대한 것처럼 그렇게 그 자비도 위대하고 무한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무한하고 위대한 것처럼 그렇게 그 자비도 위대하고 무한한 것입니다.

02/04/2016

성녀 파우스티나의 요청을 완성하기 위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주님 자비 주일로 -2005년에 세상을 떠났던 것처럼 5년 전에도 오늘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우리를  인도는 기도의 이 순간을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기로 합시다. 우리가 들었던 독서들과 사람들이 말해 준 증언들은 -이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자비의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가기 위한 빛과 희망의 빛줄기들을 열어 줍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그 자비의 얼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얼굴들은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묘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비는 지속적으로 커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 자비를 드러내시는데 지치는 줄 모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원하여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대충 익숙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만나러 오실 때 그분의 엄청난 창조성의 모습을 통해  감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그 어떤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 번 당신 이름을 밝히시면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그 이름은 “자비로우신 분”(탈출 34, 6)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무한하고 위대한 것처럼 그렇게 그 자비도 위대하고 무한한 것입니다. 자비는 그 모든 측면들을 잘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정도로 무한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성경을 훑어보면 자비란 무엇보다 먼저 당신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서 계시는 하느님이란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보호이고 구원처럼 나타나고 표현됩니다. 호세아 예언서에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다가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나타납니다. 호세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호세11,4). 아빠나 엄마가 자기 아기를 껴안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으시어 당신 볼에까지 우리를 끌어올려 당기십니다. 얼마나 큰 자애로움을 담고 있고 얼마나 큰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가 필요로 하는 이 자애로움은 오늘날의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거의 잊어버린 단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희년의 주제어를 보았을 때 호세아 예언자의 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류를 당신 어깨에 짊어지실 뿐만 아니라 아담의 볼에 당신의 볼을 가까이 대시어 두 개의 얼굴이 마치 하나로 합쳐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모시고 있는 하느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함께 나눌 줄 모르는 그런 하느님이 아닙니다(히브 4, 15 참조).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비의 힘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바로 그분께서 당신의 강생으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어느 모로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정신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셨다.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어 참으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셨다”(사목헌장 22항).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단순히 아버지의 자비를 접촉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비의 도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그 자비의 증인이 되기란 상당한 수고가 요구됩니다. 이것은 모든 생애 동안 계속되는 것이기에 그 어떤 멈춤도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참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온 생애 동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갖고 있습니까! 이 자비는 가까이 다가섬이고 자애로움이란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비는 ‘측은하게 여기는 것’이고 ‘함께 나누는 것’이며 ‘위로’이고 ‘용서’란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자비를 더 많이 입은 사람은 그것을 함께 더 나누고 더 봉헌하도록 불렸습니다. 자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숨겨두면서 자기 홀로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특별히 소외되어 있고 흔들리고 있으며 고독하게 살고 있는 약하고 멀리 떠나가 있는 사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보면서 그 얼굴을 사랑하도록 하는, 그리고 마음을 불태우는 그 어떤 것입니다. 자비는 멈추지 않습니다. 자비는 잃어버린 어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 기쁨에 넘쳐서 그 기쁨을 나눕니다. 자비는 모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바라봅니다. 왜냐하면 자비의 차원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는 소중하고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 이 사람, 저 거지들, 밖으로 내 보냅시다. 그리고 길에서 자게 놔 둡시다.” 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은 얼마나 괴롭습니까!  과연 이런 태도가 예수님한테서 오는 것일까요?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자비는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자비는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를 “뒤흔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하기(2코린 5, 14-20) 위하여 자비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끌어안고 수용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갖지 맙시다. 자비는 형제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나아가도록 우리를 받아들여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가 인도되도록 우리 자신을 가만히 맡기기로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토마스는 완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상처들을 만져 본 다음에서야 믿음을 가졌습니다. 주님의 상처를 만질 능력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자비의 표징으로서 주님의 상처들을 만질 줄 모르는 신앙은 자비로워질 수 없는 신앙이고 그런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상이고 이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육화하시어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상처받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믿고 신앙을 갖기를 원한다면 그 주님의 상처에 가까이 가서 그것을 만져야 하며 사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머리를 숙이면서 다른 이들도 우리 상처들을 사랑스럽게 어루만질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서 자신을 건네어 주시는 자비라고 외치도록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신 성령께서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느님이 생명을 주는 행동에 장애물들을 놓지 맙시다. 오히려 그분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작은 길들을 통해 그분을 가만히 따라가도록 합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도록 마음을 열어둡시다. 이렇게 주님의 상처 속으로 들어가서 용서받고 화해한 우리는 우리 가운데 부활하여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솟아오르는 기쁨의 증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 애덕 사업과 봉사 연합회의 책임자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토요일에 광장에서 이 생각을 말해야겠다.”라는 것이 떠올라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비의 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 모든 교구 안에 자비의 어떤 기구가 있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예를 들면 병원, 노인들,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집, 그리고 학교가 없는 곳에는 학교를, 마약 중독자들을 치료하는 집 등등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모든 교구가 생각해 보는 것은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나는 자비의 희년을 맞아서 살아있는 기억으로서 살아계신 예수님의 상처와 같은  생동감 넘치는 자비의 사업과 같은 것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것을 생각해 보고 우리 주교들과 이야기해 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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