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보고 멈추어 다가가 어루만져 주는 것


로마 근교의 아리치아에서 사순 피정 오일째를 맞고 있는 교황과 교황청 직원들에게 피정 지도자인 에르메스 론치 (Ermes Ronchi) 신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론치 신부는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울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믈이 멈춘 것은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 20.15)라는 목소리를 들은 다음이었다고 하였다.

측은지심으로 이끄는 세가지 행위

론키 신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에 관심을 보이셨다고 하였다. 주님께서는 성 금요일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동안 함께 매달려 있던 도둑들의 고통을, 부활의 새벽에는 마리아의 고통을 염려하셨음을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만남을 소중히 하셨고, 언제나 사람들이 가진 죄가 아닌 고통과 필요에 관심을 보이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관심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자애심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보고’, ‘멈추어 서서’, ‘다가가 어루만지다’라는 세가지 행위가 자애심으로 이끌고 고통을 줄이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측은지심. 배를 얻어맞은 것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고통을 보시고는 측은함을 느끼셨다는 이야기가 복음에서 많이 나온다. 론키 신부는 성서의 측은함이란 표현이 그리스어에서는 ‘배에 경련이 일어났다’고 표현되어 있다면서 진정한 측은지심은 추상적이거나 고결한 생각이 아닌 배를 얻어맞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전했다.  이러한 본능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고통받은 사람 앞에서 사제나 레위사람과는 달리 그냥 지나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진정한 차이는 그리스도인이나 무슬림이나 유대인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신앙인이라고 고백 하느냐 아니냐도 될 수 없다면서, 상처입은 사람 앞에서 멈추어 서느냐 그냥 지나쳐 버리느냐가 진정한 차이를 만든다고 지적하였다. 자신이 한시간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짊어져 본다면 그를 더 잘 알게되고 책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들보다 더욱 현명해져서 삶의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자비는 먼 거리에서 보여줄 수 없는 것

론키 신부는 세번째 행위인 ‘다가가 어루만지다’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움직이실때마다 그들에게 하셨던 행동임을 상기시켰다. 그분은 가장 천대받던 문둥병자와 나인지방 과부의 아들에게 다가가, 율법이 금하는데도 이를 어기시며 시신에 손을 대셨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어 그의 어머니에게로 돌려주었다고 하였다.

우리의 자비를 필요로하는 난민이나 이민자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 반드시 멈추어 서서 다가가야 한다고 말을 이었다. 자신이 보고, 멈추어 서서, 다가가 어루만져주며 눈물을 닦아주어도 죄악의 구조를 바꿀수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없겠지만, 배고픔이 이겨내지 못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비는 인간 생명의 핵심이며 그로인해 하느님께서 문서가 아닌 그분의 손길과 어루만짐과 보살핌으로 용서를 해주신다고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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