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주님을 위한 24시간을 주례하다.


교황, 주님을 위한 24시간을 주례하다.

04/03/2016

“제가 다시 볼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이 말씀은 오늘 우리가 주님께 드리고 싶은 청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죄가 선을 볼 수 있는 시각을 잃어버리게 하고 우리 소명의 아름다움을 찢어버려서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잘못을 저지른 다음 새롭게 다시 보는 것, 이것이 오늘 주님께 드리는 청원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커다란 상징성을 띠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바르티매오의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력 상실은 그를 가난으로 몰고 갔고 마을의 주변에서 살게 했으며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만들었습니다. 죄 역시 이러한 효과를 냅니다. 죄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고 격리시킵니다. 죄는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사랑에 눈을 고정시키지 못하게 장애하는 영의 시각적 불구입니다. 죄는 이렇게 조금씩 표면적인 것에 머물도록 인도하여 결국 선과 타인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마음의 시각을 흐리게 하는 힘을 가졌으며 시각을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버립니까! 얼마나 쉽게 인생은 소유한 것과 성공이나 타인으로부터 받는 존경에 달려 있다고 믿는 실수를 범합니까. 또 경제는 오직 이윤과 소비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개인적인 욕심이 사회적 책임성 보다 우선한다고 믿는 실수를 범하냐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 자신, 나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소경이 되어 우리 자신속에 틀어박혀 소진되어 버려서 기쁨도 없고 자유도 없이 지내게 됩니다. 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나가고 계십니다. 그냥 지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49절 참조)라고 복음은 말합니다. 이때 어떤 전율이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빛, 우리 자신의 어두운 시각적 불구상태에 유폐되어 머물지 않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그 우아한 빛이 우리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까운 현존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 현존은 우리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데  이것이 마음의 치유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치유되고 싶은 열망이 강렬해 질 때 기도로 인도하여 마치 바르티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참조) 했던 것처럼 강렬하게 도움을 부르짖도록 인도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복음속에 나오는 그 “많은 이” 처럼 멈추어 서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래서 고통의 절규 속에 있는 사람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좀 귀찮게 구는 그 불쌍한 사람을 조용하게 만들고 질책하기를 더 좋아합니다(48절 참조). 이것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주님과 멀어지고 예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고 맙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배고파하는 거지들임을 인정합시다. 그래서 지나가시는 주님을 피하지 맙시다. “저는 주님이 그냥 지나가실까 두렵습니다.”라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했습니다. 그냥 가버리실까 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냥 지나가시도록 그분을 놔둘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우리 모두 보다 더 참된 우리 열망을 외칩시다.  “제가 다시 볼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이 자비의 희년은 하느님의 현존속에 잠기고 온 마음으로 그 분께 되돌아가서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참으로 좋은 시기입니다. 우리도 바르티매오처럼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납시다(50절 참조)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을 향한 길로 들어서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버리기로 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는 것과 그래서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을 내버리는데 무서워하지 맙시다. 그냥 주저앉아 있지 말고 다시 일어나서 우리의 영적성장을 다시 추구합시다. -일어서서- 그리고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랑받는 자녀들로서, 주님께서 당신의 눈길로 돌보아 주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창조하신 존재로서 그 품위를 다시 회복하기로 합시다. 어쩌면 오늘 우리 마음을 울린 “일어서라”는 말씀은 인간 창조의 동일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일어서 있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일어서라”

오늘날, 특히 우리 목자들은 어쩌면 감추어져 있는 그 절규, 주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의 절규를 듣도록 불리웠습니다. 종종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행동들을 우리는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고해소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들의 실질적인 요청들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시간과 일정들, 용서하고자 하는 열망보다 더 앞서는 인간적 원칙들, 하느님의 자애로움과 멀리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지나친 엄격성. 물론 우리는 복음의 요청들을 축소시키면 않됩니다. 그러나 또한 죄인이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헛되게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제일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5,20-32 참조).

우리의 말들은 예수님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면서 바르티매오에게 말했던 그 제자들의 말이어야 하겠습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49절).우리는 용기를 북돋고 붙잡아 주면서 예수님께 인도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우리의 직무는 동반의 직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만나는 것은 개인적이며 내면적이고 구세주를 두려워함 없이 마음을 솔직하게 개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한 인격 속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복음에서 멈추어 서서 그 소경에게 물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소경을 데려오라고 지시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 소경의 말을 들으시고 치유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목자들은 –회심의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용이하게 해주며 손을 붙들어 주면서 죄를 풀어주기 위한 도구가 되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가시적이면서 효력을 내도록 합니다. 고해소에 다가가는 남녀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버지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용서하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바르티매오는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52절) 우리도 예수님께 다가갈 때 확신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기 위한 빛을 다시 보게 되며 다시 길을 따라 나서기 위한 힘과 용기를 되찾게 됩니다. 사실 “믿는 사람은 봅니다”(신앙의 빛 1). 그리고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갑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님께서 현존하시며 버팀목이 되어 주시면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과 기쁨의 길에 참여시키는데 충실한 제자들로서 그분을 따라 나섭시다. 아버지 하느님의 그 품, 아버지 하느님의 그 용서, 그 다음 우리 마음속에 축제를 지내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느님이 축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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