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구원은 성직남용주의적이거나 정치적 척색동물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하느님의 구원은 성직남용주의적이거나 정치적 척색동물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29/02/2016

하느님의 구원은 커다란 것, 권력이나 돈, 성직을 남용하거나 정치적인 척색동물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히려 작고 단순한 것들에서 나온다. 이것은 산타 마르타에서 아침미사를 거행하는 동안 교황 프란치스코가 말한 것이다.

구원은 하느님의 작은 단순함에서 오는 것이지 권력자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오늘 독서는 일종의 분노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한다. 시리아 사람 나만, 나병환자가 화를 낸다. 그는 엘리세오 예언자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그 단순한 방법으로는 치유될 것이라고 여기지 않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예수님과 동향 사람들인 나자렛 주민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화를 낸다. 이러한 화는 우리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화다. “구원은 이러할 것이다라고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법규들을 통해 “자신들의 윤리적 판단 범주안에서만 구원을 찾던 율법학자들로부터 멸시” 당하신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 제국의 권력자들과 협력하면서 구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직을 남용하는 척색동물들과 또 정치적 동물들과 힘을 합치면서 그런 방법으로 구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그들을 믿지 않았고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화를 내는지요? 왜냐하면 우리 고정관념으로는 구원이 무엇인가 커다란 것에서 오고 위대한 것에서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힘을 가진 사람들, 돈을 가진 사람들, 권력을 가진 권력자들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다릅니다. 그들이 화를 낸 것은 구원은 작은것에서 하느님의 작은 단순함에서 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부하는 복음의 두 가지 기둥들

“예수님이 구원의 길을 제시할 때-교황은 이어서 말한다-절대 큰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작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십니다. 두 가지 기둥들이란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진복팔단과 25장에 나오는 최후심판이 그것들입니다. ‘나와 함께 여기 있으십시오. 당신은 나를 위해서 이것을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것들. 당신은 권력과 힘에, 협상을 잘하는 사람들에 대해 희망을 갖지 않았고 구원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단순하게 이것을 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파스카를 준비하면서 저는 진복팔단과 마태오 복음 25장의 내용을 읽어보라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지 평화를 깨는지에 대해서 바라보고 성찰하도록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화는 교만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사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진복팔단의 끝에 예수님이 ‘왜 이 말을 하지?’라는 말을 남긴다면 이렇게 대답하면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걸려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이것 때문에 화를 느끼지 않고 화가 나지도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어리석음

교황은 다음과 같이 강론을 마친다.

“시간을 가지고 마태오 복음 25장과 진복판단의 내용을 읽는 것은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살피는 것 말입니다. 만일 어떤 화가 난다면 우리는 주님께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어리석음’임을 깨닫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아드님의 비하, 작은이가 되는 것 말입니다. 요르단강에 목욕하는 것이나 나자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것으로 대변되는 작아짐을 생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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