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축복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들로 변화시켜주고 그래서 그 생명을 나누게 합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아론의 집안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시편 115, 4-5. 8-11).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12월과 올 1월 첫 시기에 우리는 대림과 성탄시기를 거행했습니다. 이 시기는 전례주년에 따라서 하느님 백성안에게 희망을 일깨워줍니다. 희망한다는 것은 인간의 첫 번째 요구입니다. 미래를 희망하는 것, 생명을 믿는 것, 이런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희망은 진정으로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안에 자리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서는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짓 희망을 거슬러서 주의하라고 알려줍니다. 거짓 희망은 그 무익성과 경솔함을 포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양한 모양으로 우상들의 거짓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우상을 숭배하도록 계속 유혹받고 있고 그것을 희망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자들과 현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말했고 믿는 사람의 신앙의 길에 있어서 중요한 점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하느님께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만나는 시기에 인간은 그 믿음의 나약성을 체험하고 보다 더 다양한 확신성을 요구합니다. 감각되는 확신성, 구체적인 확신성 말입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 의탁한다. 그러나 상황이 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좀더 구체적인 확신성을 얻고자 한다. 이런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금새 지나가는 위로라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위로가 고독을 채우고 믿는데서 오는 어려움을 좀 줄여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돈이 줄수 있는 안전함 속에서 그 위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권력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속과 거짓 이념 속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어떤 신에게서 위로를 찾고자 합니다. 미신적으로 현실을 변화시켜주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해주는 어떤 신 말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무능하고 거짓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상을 좋아합니다. 매우 좋아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언젠가 어떤 성당에서 다른 성당으로 가야 했습니다. 대략 1킬로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걸어갔습니다. 거기에 어떤 공원이 있는데 그 한가운데 작은 탁자들이 있었습니다. 아주 많은 탁자들이 있었어요. 거기에는 점장이들이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줄지어 있었어요. 그 점장이에게 손을 내밀면 그는 어떤 대화를 시작하면서 항상 같은 말을 했습니다. 당신과 비슷한 연령의 여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내려왔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그후에는 돈을 지불했습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안전함을 줍니까? 이것은 바보같은 짓이 주는 안전함입니다. 점장이, 어떤 카드를 읽는 점장이에게 가는 것,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많이 걸려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감사의 희망 대신 그런 것에 우리는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주셨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그만큼 그분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지혜로 가득찬 시편은 세상이 우리의 바램에 던지는 거짓 우상의 실체를 은유적으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의 인간들은 바로 그 우상을 신뢰하도록 유혹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5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저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
사람 손의 작품이라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네.

그들의 손은 만지지 못하고
그들의 발은 걷지 못하며
그들의 목구멍으로는 소리 내지 못하네.

그것들을 만드는 자들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그것들과 같네”(4-8. 참조).

시편 저자는 약간 비웃는 모양으로 이 우상들의 절대적인 헛된 현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것은 단지 쇠붙이나 다른 물질로 우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정신 안에서 우리가 우리 계획과 우리가 생각하는 신적인 이상 속으로 하느님을 가두어버리거나 절대적으로 변형된 실재를 신뢰할 때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우상은 시편이 마하고 있는 우상들과 같이 예견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를 만드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그 상상 속에서 어떤 우상이 형성되면서 완전히 잘못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느끼지 못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특별히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가기 보다 그런 우상들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거짓 우상이 주는 헛된 희망에 더 만족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시는 위대하고 확실한 희망 대신 말입니다.

당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존재를 인도하시는 생명의 주님을 희망하는 것과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 절대적 주장과 재물, 힘, 성공, 세속성을 동반하는 이념들은 커다른 우상입니다. 이런 것은 그 영원성과 전능성, 그리고 육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와 건강에 대한 중요성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우상으로 변질되어 정신과 마음을 혼동시키고 생명을 유익하게 하기 보다 오히려 파멸로 인도하고 맙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에서 몇 년전 들었던 것은 끔찍하고 영혼에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훌륭한 사람이고 매우 아름답과 그 아름다움을 모두 칭찬했고 모든 것이 자연스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낙태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름다움은 매우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당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것, 그것들은 참된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시편의 가르침은 매우 분명합니다. 만일 우상에 희망을 건다면 우상들처럼 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속 없는 모습, 만지지 못하는 손, 걷지 못하는 다리, 말하지 못하는 입. 더 말할 것이 없고 변하도록 도울 수도 없으며 웃지도, 사랑하지도, 자신을 내주지도 못하는 우상으로 변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람들인 우리는 이런 위험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속화되면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머물 필요가 있지만 세속의 헛된 망상에서 보호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망상들은 앞에서 말한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이 계속 이어가듯이 하느님을 신뢰하고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축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아론의 집안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9-12절).

주님을 항상 기억합시다. 어려운 순간에도 그분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희망입니다. 희망은 실망을 주지 않습니다. 결코 말입니다. 우상들은 항상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것들은 환상들이고 실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경이로운 실재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그분처럼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축복은 우리를 그분의 자녀들로 변화시켜주고 그래서 그 생명을 나누게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말하자면 하느님의 기억의 활동에 우리를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축복을 받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알렐루야가 퍼지고 살아계신 참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참 하느님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영광 중에 부활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하고 이 하느님은 우상이 아닌 이 하느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