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을 버리고 젊은이들이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을 마무리하며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전야미사를 봉헌하며 사은 찬미가 (떼 데움)를 그 자리에 참석한 순례객들과 함께 바치고 성체 강복을 주관하였다.

교황은 강론을 통해  한해를 돌아보며 소외를 양산하는 특권에 매달리지 말것을 당부하고,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존엄한 일자리와 자유와 창조성과 참여와 연대를 통해 미래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미사를 마친 뒤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가자 추위속에서도 광장에서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성탄 캐롤과 환호성으로 교황을 맞이하였다. 교황은 불빛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트리와 구유를 돌아보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강복하였다.

이하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전문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 4.4-5)

바로오 사도께서 하신 말씀을 깊게 되새겨 봅니다. 짧고 간결하게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소개 해주고 있습니다. 당신 아들과 함께 살게 해주시도록 말입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이것의 울림입니다. 율법을 넘어선 그분은 사랑의 결심으로 인해 모든 특권으로 잃게 되고 율법 아래에 놓인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시기 위해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오십니다. 놀랍게도 어린아이가 되시기로, 방금 태어난 약한 아기가 되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직접 당신께서 다가오셔서 우리의 육신을 당신의 육신으로, 우리의 약함을 당신의 약함으로, 우리의 미소함을 당신의 미소함으로 안아 주시기로 결정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분장을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자체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조건을 함께 하십니다. 이상적인 상황이나 추상적인 핵심에 갇혀있지 않으시고 멀리 떨어져, 상실감과 부끄러움, 상처와 절망, 비통함으로 닫혀 있는 있는 이들이 가깝게 느끼도록 다가오십니다. 외톨이나 외로움의 심정을 지닌 모든 이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죄인들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들, 상처받은 이들, 비통한 이들, 소외된 이들이 당신의 아들이 되어 최후의 판결을 받지 않도록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성탄구유는 하느님의 논리로 우리를 초대해 줍니다. 양도할 수 있거나 아는 이들을 위한 특권에 대한 논리가 아닙니다. 만남과 다가섬과 가까움의 논리입니다. 구유는 일부의 특혜에 대한 논리나 타인들을 소외시키는 논리를 내려 놓으라 이야기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소외를 야기시켰던 특권의 쇠사슬을 끊고 모두를 포함하는 자애의 손길을 주시어 모든 이들이 맨 처음 창조된 것처럼 존엄함으로 빛나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당신이 직접 오십니다. 강보에 쌓인 아이는 선물처럼, 봉헌처럼, 불씨처럼, 만남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라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천진난만하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분리시키고 분열시키는 특권의 논리가 여러 가지 유혹으로 삶의 자리에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외시키고, 우리를 소외되도록 만들며, 꿈과 수많은 형제들로부터 분리시키고 스스로를 가두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 베들레헴의 아기 앞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비추어 주실 수 있도록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근시안적이 될 때도 많고, 자신의 권력이나 스스로의 도식에 따라 다른 사람을 강제하려는 통합론적인 행동을 하려는 강요를 받을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더 우월하고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욕을 비춰 줄 그분의 빛이 필요합니다. 이 빛은 겸손과 다시 일어서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음의 용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며, 구유 앞에서, 이름없는 이들의 모습으로 수없이 증언되고 드러난, 우리 삶과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너그러움의 표징들에 대해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의 행위는 소득없는 이방인의 행위도 이상적이거나 무관심으로 변한 과거에 대한 빈 추억도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기에 개인적이며 공동체적인 창조성이 깨어나도록 도와주는 살아있는 기억입니다.

우리가 구유 앞에 멈추어 서서 매 순간마다 감사와 축복을 청하며 올 한해동안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을 어떻게 드러내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구유는 아무도 잃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구유를 바라본다는 것은 역사 안에서 비통이나 비극이 아닌 우리의 자리를 돌아볼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스스로를 가두거나 모면하려 하지 않고, 특권으로 향하는 뒷길을 찾지 않고 말입니다. 구유를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올 희망과 견고함의 시작을 뜻하며 공허하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거나 외양에 끝없이 몰두하는 것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구유를 바라봄은 결단력과 용기로 미래를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느님 덕분에 당신의 일에 함께하는 우리가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와 관계하시며 우리끼리는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구유를 바라보며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을 만납니다. 희망과 불안 그리고 의문을 동시에 짊어진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아기이신 하느님을 키운다는 미래의 쉽지 않은 일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돌아보지 않고,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지 않고서 미래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단순한 책임이 아닙니다. 적당한 말은 빚이 됩니다. 네, 우리가 그들에게 진 빚입니다. 끝나가는 한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영원히 젊음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문화를 만들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사회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서서히 그들을 사회의 변방으로 밀어내어 고향을 떠나거나 일자리를 구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미래가 존재하지 않게 됨으로써 내일을 만들어 주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젊은이들에게 사회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해주는 존엄하고 실질적인 일자리에서 우리 자신들이 특권화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기대하고 요구하면서도  그들이 두드리는 문은 대부분 열어주지 않으며 차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젊은 부부 앞에서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베들레헴의 여관주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요청받습니다. 삶의 자리도 미래를 위한 자리도 없었습니다. 각자가 아무리 작아도 우리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진정한 가능성을 지닐 수 있도록 돕자는 약속을 하기를 청합니다. 그들의 손과 마음과 선조들의 꿈을 실현시킬 능력을 뿌리치지 맙시다.(요엘 3.1 참조)  우리가 그들에게 존엄한 미래를 주고자 한다면 젊은이들을 위한 존엄한 일자리와 자유와 창조성과 참여와 연대라는 진정한 소속감이 있어야 가능해 질 것입니다.(샤를마뉴상 수상 소감, 2016.5.6 참조)  

구유를 바라봄으로서 젊은이들이 우리의 미숙함으로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그들이 꿈을 꿀 수 있고 이를 위해 싸워나갈 수 있도록 자극을 주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그들은 성장할 능력들이 있으며 우리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아기이신 하느님을 묵상해 본다는 것은 한해를 마무리하며 좋은 일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원이며 뿌리로 돌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으로 우리 믿음은 희망이 되며 축복과 불씨가 되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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