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 오전 교황 프란치스코는 수요일 일반 알현에서 다음과 같은 강론을 남겼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웰빙’이란 말속에 담긴 결과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을 자기 자신 안에 가두어 버리도록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무관심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몇 해가 지나면 사라지는 인생을 순간적인 것으로 제시하면서 우리 인생이 마치 계절에 따라 왔다 가는 유행인 것처럼 제시합니다. 현실은 그 실재하는 바에 따라 대면해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현실은 우리를 자주 긴급히 필요한 것들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의 행위들 가운데에는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님 것. 얼마나 자주 홍보 매체들은 우리에게 음식과 식수의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수반하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이런 정보들, 특히 어떤 영상물들을 보게 되면서 여론이 달아올라서 유대성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도움의 손길이 형성됩니다. 헌금들이 풍요롭게 되고 그래서 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게 됩니다. 애덕의 이런 형태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쩌면 직접적으로 우리를 참여시키지는 않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을 만날 때 혹은 우리 집 문을 두드리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는 상당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상물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그 남자와 여자, 나 사이에 거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인 가난은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불만스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남자, 여자, 어린이의 육신에 있는 가난을 볼 때 그것은 우리에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피하거나 가까이 오는 것을 피하고 혹은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약간 유행 정도로 변장시키는 습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실에서 멀어져 가고 맙니다. 나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그를 만날 경우 더 이상 거리감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내 반응은 어떠합니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지 다른 대로 지나가는지? 아니면 대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고 그 사람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지? 어떤 방법으로든 그 사람을 받아들이거나 가능하면 빨리 거기서 떠나려고 하는지? 그렇지만 당신이 이것을 행한다면 당신에게 ‘그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미친 짓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아주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말입니다.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도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말에 대해서 진정한 주의를 기울이기 않는가 말입니다.

성경의 시편에서 하느님은 “모든 육신에게 빵을 주시는 분”(136,25)이라고 말합니다. 배고픔을 겪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전쟁이나 흉년의 시기를 지내 본 사람은 이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은 매일 반복되고 있고 넘쳐서 남아나는 상황 옆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항상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2,14-17). 이것은 애덕과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위임할 수 없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은 나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나의 도움과 나의 말과 나의 노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은 장시간 자신을 따르던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참조). 그들이 갖고 있던 약간의 빵과 물고기를 가져오도록 하시고 예수님은 그것들을 축복하시고 쪼개어 모두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수업입니다. 우리가 조금 갖고 있는 것을 예수님의 손에 맡기고 신앙으로 나눈다면 그것은 아주 풍요로운 것으로 변화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자신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교회를 세우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 곧 연대와 재화의 분배에 관한 가르침에 응답하는 보편 교회의 윤리적 의무입니다… […] 물에 대한 권리와 마찬가지로 식량에 대한 권리도 기본적인 생명권을 비롯한 다른 권리들을 추구하는 데에 중요합니다. 따라서 식량과 물의 이용은 어떤 구분이나 차별 없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고 여기는 여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27항). “내가 생명의 빵”(요한 6,35)이란 말씀과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7,37)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잊지 말도록 합시다. 이 말씀들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일종의 자극입니다. 이 말씀은 일종의 자극입니다. 왜냐하면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을 통해서 하느님과 우리 관계가 진행된다는 것을 인지하도록 하는 자극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실 예수님 안에서 당신 자비의 얼굴을 계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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