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4. 네셔널 가톨릭 리포터의 조수아 멕클위 기자의 질문: 감사합니다, 교황 성하. 어제 조지아에서 말씀하셨을 때 다른 나라들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젠더(성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교황님은 그것은 혼인을 반대하는 커다란 원수이자 위협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것을 질문해보고자 합니다. 수년 동안 자신의 성에 대해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에게, 그리고 생물학적 문제가 있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그래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생각하는 어떤 남자나 여자가 자신의 신체적 모습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요? 목자요 직무를 수행하는 분으로서 교황님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동반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 자, 우선 저는 사제로서, 주교로서-또한 교황으로서- 제 인생을 통해 동성애의 성향과 실제로 동성애를 실행하는 사람들을 동반해 왔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동반했었고 주님께 가까이 가도록 인도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을 동반했고 그 누구도 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이 동반하셨던 것처럼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 놓여 있는 사람이 예수님 앞에 갔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저리 가십시오, 당신은 동성애자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은 분명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말했던 것은 오늘날 ‘젠더’라는 이론으로 세뇌시는 나쁜 것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어떤 프랑스 아버지가 저에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식탁에서 자녀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가톨릭 신자이고 부인도 가톨릭 신자이며 자녀들도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입니다-, 그 아버지는 열 살 난 자식에게 ‘너는 커서 무엇을 하기 바라냐?’하고 물었습니다. ‘여자’. 그 아버지는 학교에서 ‘젠더’에 대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을 바꾸면서 말입니다. 사고를 바꾸기 위해서 학교에서 이런 식의 교육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하는 ‘이념의 식민지화’입니다.

작년에 저는 자신의 유년기와 소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적어서 보낸 어떤 스페인 사람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여자아이였고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아이로서 느끼고 있었고 육체적으로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그 엄마에게 말했고 그녀는-이미 22살이 되었습니다- 엄마에게 수술을 받고자 한다는 원의를 말했습니다. 그 엄마는 수술을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엄마는 아직 살아있었지만 노인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아이는 수술을 했고 지금 그는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교에게 갔습니다. 그 주교는 그를 잘 동반해 주었습니다. 훌륭한 주교라고 봅니다. 그런 사람을 동반해 주는 것은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 다음 그는 결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혼했고 저에게 편지를 해서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 자기 부인과 함께 오는 것은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여자 아이였습니다. 저는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행복해 했습니다.

그가 살던 곳에는 80살의 어떤 노 사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본당 신부였고 이제는 본당을 떠나서 수녀들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본당 신부가 있었습니다. 새 본당신부는 그(스페인의 성전환 수술자)를 보면서 길거리에서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노 사제를 찾아갔을 때 그에게 노 사제는 ‘얼마 만에 고해성사를 보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노 사제는 그에게 ‘고해 성사를 받으러 나에게 오고 그러면 성사를 주겠으며 그다음 영성체를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인생은 인생입니다. 생기는 일들은 직면해야 합니다. 죄는 죄입니다. 성향이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고 그래서 우리는 말하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똑같은 것이니 축제를 벌입시다’. 이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경우를 받아들이고 동반하면서 연구하고 식별해서 통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께서 하실 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교항은 트란스들을 성화시킬 것이다’. 부탁합니다. 저는 일간지들의 의도를 읽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니죠, 아닙니다. 제가 말한 것에 대해 의심할 것이 있습니까? 저는 분명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문제입니다. 문제입니다. 인간적인 문제입니다. 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의 자비와 진리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혼인의 경우 말한 것처럼 ‘사랑의 기쁨’ 전체를  읽으면서 항상 열린 마음으로 읽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베젤라이의 조각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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