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일 위로를 받으며 살고자 한다면 인생에서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오늘 오전 현지 시각 10:00에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있는 미헤일 메스히 경기장에서 미사성제를 봉헌했다. 메스히 경기장은 조지아의 20세기 유명한 축구 선수 미헤일 메스히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경기장으로 약 2만 7천 명 정도를 수용한다. 이 미사에는 조지아 정부 요인들을 비롯해서 조지아 총대주교의 대표들과 칼데아 교회의 대표들, 그리고 아르메니아 가톨릭,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들의 대표들도 참여했다. 교황은 오늘 미사에서 다음과 같은 강론을 남겼다.

우리가 만일 위로를 받으며 살고자 한다면 인생에서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의 많은 보화들 가운데 위대한 여성들이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그 여인들은-오늘 저희가 기억하고 있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기록하고 있듯이-“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자서전, A, VI). 조지아에는 성녀 니노에 의해서 이 땅에 뿌려진 신앙을 전하고 지키는 많은 어머니들과 할머니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메마르고 전쟁으로 이루어진 곳에서 하느님의 위로라는 신선한 물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말하고 계신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기 자신 위에 자녀들의 어려움과 노고를 짊어지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 죄와 잘못을 짊어지십니다. 우리를 잘 아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보실 때마다 측은한 마음을 가지시고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사랑의 동정심을 가지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악을 넘어서서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품에 우리를 품으시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위험과 악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신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하신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도록 합시다.

인생의 많은 어려움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참된 위로의 샘이기 때문이고 거기에서 우리를 악에서 구하고 평화를 가져다주며 기쁨을 성장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위로를 받으며 살고자 한다면 인생에서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항구히 머무시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그분께 열어드리고 밖으로 그분을 내 쫓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열려 있도록 하기 위한 위로의 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곳에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매일 읽고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복음, 침묵 가운데 하느님을 흠숭하는 기도, 고해 성사, 성체 성사가 바로 그 문들입니다. 이 문들을 통해서 주님은 들어가시어 새로운 맛을 주십니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을 때 그분의 빛은 들어가지 못하고 어둠에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잘 진행되지 않는 일들과 바뀌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비관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슬픔과 고뇌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홀로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위로의 문들을 열어 재치면 주님의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마음속에서만 위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66, 13절). 예루살렘, 다시 말하자면 하느님의 도시, 공동체 안에서 위로를 받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일치해서 친교를 이룰 때 하느님의 위로가 작용합니다. 교회 안에 위로가 있으며 교회는 위로의 집입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위로하시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나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사람인가? 나는 지쳐 보이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고 손님처럼 다른 사람을 수용할 줄 아는가? 고통받고 폐쇄된 상태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체념 속에 있는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실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며 예수님의 빛과 그분의 따스한 현존과 용서를 통한 활력을 전달하도록 불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고 불의와 어려움을 겪으면서 불안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문제를 제거하고 평화로이 고통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랑의 힘을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강림이 마음에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받고 전달하는 것. 이것이 교회가 긴급하게 수행해야 할 사명입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것에 불림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안 좋은 것들 속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나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약간의 불화 때문에 슬퍼하지 맙시다. 폐쇄적인 교회적 ‘분위기’에 습관 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넓고 희망에 열려 있는 전망을 나누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우리 자신 밖으로 나가서 문을 열려고 하는 겸손한 용기를 사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기억시켜주고 있는 조건, 그러니까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이와 같이 작아지는 것입니다(마태 18, 3-4. 참조), “어미 품에 안긴 젖 뗀 아기”(시편 130, 2)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작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작은 아기들만이 엄마의 품에 안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듯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마태 18,4)인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위대함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작아지게 하는 것에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지고한 생각과 높은 학식으로 인식되지 않고 겸손하고 신뢰하는 작은 마음으로만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 앞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명예와 특권, 지상적인 성공과 부유함을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어린이는 줄 수 있는 아무것도 없는 모든 것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약하고 엄마 아빠에게 의존되어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같이 자신을 작아지게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서는 가난해지지만  하느님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입니다.

어린이들은 하느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느님은 반항하지 않고 이중성이 없으며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들과 큰일을 이루신다고 말입니다. 복음서에는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통해서 큰일을 이루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약간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마태  14,15-20. 참조), 겨자씨의 비유(마르 4,30-32. 참조), 땅에 떨어져서 죽는 밀알(요한 12,24. 참조), 물 한 목음을 주는 것(마태 10,42. 참조),, 가난한 과부의 은전 두 닢(루카 21,1-4. 참조), 주님의 종이신 성모님의 겸손(루카 1,46-55. 참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놀라운 위대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경이로움을 사랑하시어 놀라움으로 가득하신 하느님의 위대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이로운 놀라움에 대한 신뢰와 열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분의 자녀들임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들이 아니며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우니를 독존적인 성인들이 아니고 자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고 그 품에 안길 필요가 있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이 복음적 단순성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입니다. 필요한 것들이 결핍되어 있지만 하느님으로 부유한 이들입니다. 세속적 성공의 논리에 편승하지 않고 사랑의 법을 따르는 목자들은 복된 이들입니다. 수용, 경청, 봉사. 기능주의 원칙과 조직적 효능성에 기대하지 않고 상상을 추구하지 않는 교회는 복됩니다. 조지아의 이 사랑받는 작은 양 떼들이여, 그대들은 사랑과 교육에 헌신하면서 자신의 어깨에 그대들을 짊어지고 위로하시는 착한 목자의 격려를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요약하면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성녀께서는 하느님을 향해 가는 ‘작은 길’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자기 아버지의 품에서 아무 두려움 없이 잠들어 있는 작은 어린 아기의 의탁, 왜냐하면 예수님은 위대한 행동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의탁과 인정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서전, A). 그러나-성녀께서 그 당시에 기록하셨지만, 지금도 그런 지경인-하느님은 “완전히 당신께 맡기고 무한한 사랑이신 분의 자비를 이해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소수”라는 것을 직면하십니다. 이 젊은 성녀, 그리고 교회의 박사는 “사랑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전문가였습니다(같은 책).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완전한 애덕은 다른 이들의 결점을 인내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나약함에 놀라지 않는데 존재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애덕은 실천하고 있는 아주 작은 덕스러운 행위들에 의해서 이룩됩니다”. 또한 성녀는 이러한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애덕은 마음의 한 구석에 그냥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서전, C). 우리 모두 함께 오늘 단순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기로 합시다. 사랑의 양순함이 지닌 힘을 믿고 살아가는 단순한 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비를 전적으로 믿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은총을 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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