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느님 자비의 표징이요 도구가 되도록 믿음의 은총을 청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9월 7일 있었던 일반 알현에서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 자비를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두지 않도록 하자고 언급하였다.

교황은 마태복음 11장 2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묵상하며 세례자 요한이 가졌던 메시아에 대한 이미지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자비의 말씀이나 실천과는 달랐음을 이야기하며 오늘날에도 자신의 필요나 욕구에 따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제한하고 올바른 자리를 내어 드리지 못하고 있음을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신 사랑의 신비를 삶으로 체험하고 성장하기를 소망하신다고 밝히며 스스로가 자비의 표징이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믿음의 은혜를 청하자고 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가르침 전문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오늘 마태 복음(11장 2-6절)을 들었습니다. 복음사가가 의도하는 하는 것은 그분의 자비와 선의를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신비로 더욱 깊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감옥에 있었던 세례자 요한은 명확한 질문을 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어두움의 시대에 당연한 것이겠지요.

세례자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갈망하며 기다렸으며, 자신의 설교를 통해 강렬한 어조로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정화시키며 선한 이들에게 상을 내리고 악인들을 벌할 재판관과 같은 이를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예수님께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요한은 고통받았고 감옥의 독방과 그분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의 어두움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그분이 메시아이신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할지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언뜻 보기에 세례자 요한의 요청에 답변하지 않으시는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답변입니다.

여기에 주님이신 예수님의 의중이 명백히 들어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현실적인 도구라는 답변이십니다. 위로와 구원으로 모든 이들을 만나시고 하느님의 심판이 이러한 모습일거라 드러내십니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 나병환자들, 귀머거리들이 존엄을 회복하고 병으로 더이상 소외받지 않게 되며 죽은 이들이 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선포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활동의 개관이며 하느님과 동일한 활동이 눈으로 보이는 유형의 모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말씀이 교회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 죄인을 벌하거나 나쁜 이들을 없애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하느님의 선함의 상징을 보여주시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게 해 주심으로서, 회개로 초대를 하십니다. 시편에서 말하듯 말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4)

세례자 요한의 설교 핵심은 정의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첫 번째로 두십니다. 선구자의 혼돈스러운 의구심은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으로 대치되며 예수님의 답변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여기에서 의심은 장애입니다. 예수님의 특정 위험을 경고하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실행을 믿는 것에 장애가 있다면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말씀에 따르면 지복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경고는 언제나 현실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간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맞게 만듭니다. 각자는 자신의 방법으로 믿음을 가두고 자신이 바라는 것에 맞추어 하느님의 자리를 제한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우리의 삶과 의식 전체를 요구하는 주님을 향한 회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 우상으로 하느님을 축소시켜 버립니다. 거룩하신 이름을 자신의 이익이나 미움이나 폭력을 위해 이용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하느님을 어려울 때에 마음의 안정을 위한 심리적인 위안으로 여깁니다. 자신만을 위한 믿음입니다. 형제들을 향하도록 해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역사 속에서 수 많았던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좋은 스승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으로 갇힌 관계는 숨막히게 하고 세상과 역사를 바꿀 힘이 있는 소명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믿으며, 그분께서는 당신 사랑의 신비를 삶으로 체험하며 성장하기를 소망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실행되는 것에 어떠한 장애도 만들지 않도록 약속하며 우리도 자비의 표징이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큰 믿음을 주십사 청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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