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130, 3-4).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마태오복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11,2-6). 복음 사가의 의도는 예수님의 신비에 보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 선하심과 자비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질문을 하러 예수님께 자기 제자들을 보냅니다.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3절).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도래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선포에는 짙은 색깔로 그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는 마치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백성을 정화하시면서 선한 이들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마태 3,10).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시려는 이 순간 요한은 고통받고 어둠에 빠져 있었습니다. 감옥의 작은 방, 그리고 마음의 어둠, 예수님의 방법을 알아듣기 힘든 상황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말 그분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얼핏 보면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사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4-6).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여기에 주 예수님의 의도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의 구체적 도구라고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다가가서 위로를 건네며 구원을 선사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십니다.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사람들, 나병에 걸린 사람들,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품위를 다시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의 병 때문에 배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은 다시 살게 될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복음이 선포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동하시는 방식의 요약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보고 체감하도록 합니다.

교회가 받은 예수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은 죄인들을 벌하고 악인들을 징벌하시기 위해서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회개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느님의 선하심 표징을 보고 회개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130, 3-4).

세례자 요한이 자신의 선포 중심에 두었던 정의는 예수님 안에서 우선 자비로 드러납니다. 선구자의 의구심은 예수님이 앞으로 행하실 행동과 말씀이 불러일으킬 불확실성들을 먼저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답은 이런 말로써 종결됩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v. 6). 스캔들이란 단어는 ‘장애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특별한 위험에 대해서 주의를 주십니다. 만일 당신의 자비로운 행동들이 장애의 원인들이라면 그것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모습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 앞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이들은 복된 이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의는 항상 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은 당신의 실재적인 현존을 맛보는 것을 장애하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너의 신념대로 행하는 것’으로 재단하여 하느님을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의견이란 영역으로 가두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계시하신 주님에게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양심과 생활에 장애를 초래합니다. 다른 이들은 하느님을 어떤 우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또는 미움과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사용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하느님을 단지 심리적인 피난처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어려운 순간을 피하는 도피처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념은 그 자체에 접어서 말아버린, 그래서 형제들을 향하여 가도록 하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힘에 젖어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역사에 존재했던 윤리적 가르침의 좋은 스승 정도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신앙을 예수님과의 순수 내밀한 관계라는 틀 안에서 숨 막히게 하면서 세상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가능한 선교적 영말을 포기해버리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열망은 그 사랑의 신비 안에서 살아있는 체험을 성장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로운 행동을 방해하는 그 어떤 장애물들도 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비의 표징과 도구들의 될 수 있는 깊은 신앙의 선물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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