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용서와 자비의 도구가 되도록 청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8월 4일 이탈리아 중부의 아시시에 800년간 이어져 내려온 ‘아시시의 용서의 전대사’를 기념하기 위해 포르지운쿨라(Porziuncola)를 방문하는 개인적인 순례를 떠났다.

교황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을 방문하고 포르지운쿨라 경당에서 개인적인 침묵 기도 후 마태 복음에 근거한 용서에 대한 묵상을 그 자리에 함께 한 프란치스코회 소속 주교 및 장상들 그리고 순례자들과 나누었다.

이후 참석자들이 묵주기도를 봉헌하는 동안 신자들의 고해를 들은 뒤 성당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짧게 용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한 뒤 아시시를 출발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교황명으로 정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축일인 지난 2013년 10월 4일에도 방문한 바 있다. 

포르지운쿨라는 아시시 근교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Santa Maria degli Angeli) 성당 내부에 있는 경당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13세기에 재건하고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시작한 장소이다.  

포르치운쿨라 전대사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제대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에게 신자들을 위한 전대사를 청하여 허락을 받은 뒤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 확인을 받은 뒤 공포되었다. 천사들의 성모 축일 전날인 8월 1일과 축일 당일인 2일에 방문을 할 경우 용서의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전통은 800년간 이어져 왔다.

이하 교황의 나눔

오늘 그 무엇보다 앞서, 친애하는 형제 자매들과, 오랜 전통에 따라 프란치스코 성인이 바로 이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과 주교들 앞에서 선포하였던 이야기를 상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아시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총과 끝없는 기쁨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보다 더 아름다운 요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국은 사랑의 신비로 하느님과 우리를 영원히 결합시켜주는 곳이 아닐런지요. 교회는 모든 성인들과의 통공을 믿는다는 신앙을 고백해 왔습니다. 우리가 신앙 안에서 살아갈 때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인과 복자들과 더불어 순박한 기쁨으로 신앙의 삶을 살고 증거자였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고 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유일한 세례를 받고 ‘하나이신 성령’과 함께 우리는 ‘한 몸’이 됩니다. (에페4.4 참조)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호노리오 3세 교황께 포르지운쿨라를 방문하는 이들을 위한 전대사의 은총을 청할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천국에서의 자리를 얻기 위해 가야하는 중요한 길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타인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같이 생각해 봅시다. 여기 포르지운쿨라에서 모두 용서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직접 체험하도록 우리에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용서, 또는 최소한 용서하고자 하는 원의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 가르쳐 주신 비유 말씀을 들었습니다.(마태 18.21-35 참조)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왜 용서해 주어야 할까요? 우리가 먼저 용서받은 이들이며 끝없이 용서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빠짐없이 우리 모두는 용서받았습니다. 잠시 침묵 중에 우리가 한 큰 잘못들과 그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비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애정이며 용서의 마음입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애정의 마음입니다.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하는지요.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용서는 또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 말하는 그대로 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소서’(마태6.12)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죄는 빚이 되었고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우리가 용서해야만 합니다.

우리 각자는 비유 말씀에서 평생 갚지 못할 만큼의  커다른 빚을 있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해소에서 사제 앞에 무릎을 꿇을 때 종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주님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부족한 점이 가득하고 같은 죄를 자주 저지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할 때마다 용서해 주시기를 계속하십니다. 우리가 같은 죄에 빠져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시기에 완전히 죄를 사해 주십니다. 비유 말씀의 임금처럼, 하느님께서는 자비심으로 자애심과 함께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를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의 아버지께서는 회개를 할 때마다 불쌍히 여겨 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 받았고 자유로워졌다고 말씀해 주셔서, 우리가 평온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아는 것 이상이며, 잘못을 저질러도 당신께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청하는 마음을 보십니다.

유감스럽게도 문제는 우리에게 작은 불의를 행한 형제들과 대적하고자 할 때 생깁니다. 비유 말씀에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마태18.28) 이 장면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빚을 지고 있을 때는 자비를 청하지만 우리에게 빚진 이가 있을 땐 정의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이 행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할 행동이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형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가르치셨고 한계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어라’(22절)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정의 실현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정의로운 것으로 제한을 둔다면,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랑의 가치를 보여준 십자가 아래에서의 자비를 드러내야 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할 것입니다. 비유 말씀 마지막 부분을 잊지 맙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이곳 포르지운쿨라에서 ‘통로’가 되었고 8세기 동안 천국으로의 길을 이어주었습니다. 자비의 희년에 용서의 길이 교회와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명확해 집니다. 포르지운쿨라는 우리 모두가 도망가지 못하고 실천하도록, 오늘날의 세상에 자비의 증거가 되어 줍니다. 반복합니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오늘날의 세상에서 자비의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용서할 줄 몰라서, 자신과 타인들의 삶을 망가트리며 기쁨과 평온과 평화 대신 원망에 갇혀 증오를 키워갑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 우리가 언제나 겸손한 용서와 자비의 도구라는 표징이 되도록 전구해 주십사고 청합시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수사신부님들과 주교님들께서 고해실로 가실 땐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자비를 보여주십시오.  ‘신부님, 같은 죄에 다시 빠지곤 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탕자를 반기듯 언제나 가는 길을 지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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