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말로 하는 자비와 실천하는 자비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30일 오전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알현을 통해 각자의 양심에 따라 자비에 대하여 말만 하고 있는지 아니면 실천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자고 언급하며 실천하지 않는 자비는 죽어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36절까지의 최후의 심판 내용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며 자비는 실천을 해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신다면서 가장 어렵고 소외받는 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전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 사목방문을 언급하며 아르메니아 정교회 총대주교 카레킨 2세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준 것에 대하여 감사를 표하고, 같은 코카서스 지역인 죠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방문도 계획되어 있음을 언급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가르침 전문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희년을 시작하며 얼마나 많이 자비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심각한 양심 성찰을 하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사실 자비가 상징적인 언어가 아닌 삶의 형태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각자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는 삶의 형태입니다. 자비롭게 살 수도 있지만 자비롭지 않게 사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비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그것을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야고보 사도의 서간을 빌려 이야기 한다면(2.14-17 참조) ‘실천없는 자비는 죽은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영적 물질적 어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이 자비를 살아있도록 만듭니다. 자비는 보기 위해서 눈을 가지고 있고, 듣기 위해 귀를 가졌으며 일으켜 세워 주기위해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상의 삶은 우리 손으로 직접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가난한 이들의 현실과 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수많은 형제 자매들이 고통과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음을 알아채도록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와는 상관 없는 듯한 비극적 가난이라는 상황을 지나쳐 갑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에 황량한 삶과 무감각으로 영혼이 무기력해져 결국은 우리가 위선자가 되도록 만드는 무관심으로 인해 그들을 지나쳐 버립니다.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영적이며 물질적인 도움의 필요성을 보지 못하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타인에게 봉사하지 않는 이들은 진짜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섬기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느님의 자비에는 얼마나 많은 모습이 존재합니까! 또한 자비를 우리에게 청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얼마나 많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자신의 삶에서 체험한 이는 자신의 형제들이 도움이 필요로 할 때 모른척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도망갈 길을 주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헐벗고, 나그네가 되고 병이나고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태 25.35-36) 배고픈 이를 어느 누구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리 말씀하셨습니다. 자비의 활동은 이론이 아닙니다.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야 합니다.  

세계화라는 변화로 인해 발생한 물질적 정신적 가난은 증가되었습니다. 개개인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위해 자애를 생각하는 자리를 만들어 줍시다. 이를 통해 자비의 길은 더욱 확실해질 것입니다. 잘 살려고 하는 문화로 인해 만들어진 가난이 생기기 않도록, 그리스도인다운 시선이 핵심을 볼 줄 모르고 약해져버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가 파수꾼같은 감시자가 되어 있기를 청합니다.  

핵심을 볼줄 안다는 것의 의미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감옥에 갇히고, 병이 났으며 헐벗고, 일자리도 찾지 못하는데 가족을 부양해야 되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외롭고 슬픈 이들, 실수하고 조언이 필요한 사람들, 침묵 중에도 동행이 필요한 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들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청하시는 모습입니다. 이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저를, 여러분들을 그렇게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해 봅시다.

몇일 전에 주님께서는 기원 4세기 초에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나라인 아르메니아를 제가 방문 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긴 역사 안에서 순교자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증거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 여행을 허락해 주셨음을 감사드리고, 아르메니아 대통령과 카톨릭 신자들과 카레킨 2세, 정교회 사람들과 카톨릭 주교들 그리고 모든 아르메니아 인들에게 형제애와 평화로 순례할 수 있도록 환영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석달 뒤에,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코카서스 지역인 죠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하게 됩니다. 두 가지 이유로 이들 두 나라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한가지는 -언제나 다른 종교와 문화와 대화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현존하는 오래된 그리스도교 뿌리가 지닌 가치를 위함이며, 두번째는 희망과 평화로의 길에 힘을 보태기 위함입니다.  역사는 평화를 향한 길에는 견고하며 지속적인 걸음이 필요하고, 작은 걸음부터 차근차근 성장해 가며 상호간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모두가 그리고 각자가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기여를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거자가 되고, 정의와 연대를 이룩하는 사회의 누룩이 되도록 형제적 일치를 이루는 노력을 하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이를 위해 방문기간 중 자신의 집에 형제로서 저를 맞아들여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최고 수장과 늘 동행하였습니다.

다시금 모든 주교들과 사제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아르메니아 신자들에게 인사를 전합니다.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믿음 안에서 우리가 굳건하며 자비의 실천에 너그럽고 만남에 열려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청합니다. 감사합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