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심에서 우리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이 계속되는 그분의 자기 증여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충실하고 양순한 사랑의 원천을 만납니다.


예수 성심에서 우리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이 계속되는 그분의 자기 증여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충실하고 양순한 사랑의 원천을 만납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들의 희년을 거행하는 우리는 마음, 내면, 생명의 가장 강한 뿌리, 정감의 핵심, 한 마디로 인간의 중심을 찌르도록 불렸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마음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목자들인 우리의 마음입니다.

착하신 목자 예수님의 마음은 단순히 우리에 대한 자비를 간직하고 있는 마음이 아니라 그 자비 자체입니다. 거기에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이 빛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받아들여졌고 있는 나로서 이해받고 있다는 확신을 느낍니다. 거기에서 저는 저의 한계와 죄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어 사랑받고 있다는 확실성을 맛봅니다. 예수 성심을 바라보며 저는 주님에 대한 첫사랑을 새롭게 합니다. 주님께서 제 영혼을 어루만지시어 당신을 따르도록 저를 부르셨던 기억과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여 인생의 그물들을 내버렸던 그 기쁨 말입니다(루카 5,5 참조).

착한 목자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은 끝이 없고 지칠 줄 모르며 꺾이는 법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이 계속되는 그분의 자기 증여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충실하고 양순한 사랑의 원천을 만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에서 강요하지 않으시면서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요한 13, 1)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시 발견합니다. 그분은 멈추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착하신 목자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 확장됩니다. 특히 그 마음은 보다 더 멀리 떠나 있는 사람에게 빛을 펼칩니다. 거기에서 예리한 침으로 찔리고 있고 특별한 사랑의 약함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성심은 모든 이에게 도달하여 그 누구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성심 앞에서 우리 사제 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 사제들이 아주 자주, 매일, 매주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내 마음은 어디로 향해 있는가? 직무는 종종 수 많은 일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 일들은 많은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교리교육에서부터 전례, 애덕 활동, 사목적인 활동을 비롯하여 행정업무까지 말입니다. 수많은 활동들 가운데에서도 질문은 계속 남게 됩니다. 내 마음은 어디에 고정되어 있는가, “어디에 참된 기쁨이 있는가…”라는 전례의 아름다운 기도가 생각납니다. 마음이 어디에 꽂혀있나, 무슨 보물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은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는 많은 허약함이 있습니다. 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깊은 곳으로, 그 뿌리들로 내려가야 합니다. 나의 허약함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죄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서 주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내 ‘보물’은 어디 있는가?

예수 성심 속에 있는 대체될 수 없는 두 가지 보물은 바로 아버지와 우리입니다. 예수님의 일과는 아버지와의 기도와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만나고 계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목자들이 사제들의 마음도 오직 이 두 방향으로 고정되어야 합니다. 주님과 사람들. 사제의 마음은 주님의 사랑의 사랑에 찔린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과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자기를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제의 마음은 더 이상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도록 내버려 두는 ‘춤추는 무용수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더 이상 여기저기를 돌면서 작은 만족들을 추구하고 합의를 보는 마음도 아닙니다. 그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형제들에게 열려 있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위해서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굳건한 마음입니다. 거기에서 그의 죄들이 용서를 받게 됩니다.

착하신 목자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 마음이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 종류의 훈련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들은 우리에게 찾아 나서는 것, 수용하는 것, 기쁘게 사는 것을 권고합니다.

찾아 나서는 것.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 자신이 당신 양들을 찾아나서신다는 것을 기억시켜 줍니다(34, 11. 16) 복음에 따르면 그분은 위험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루카 15,4)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어떤 지체함도 없이 목장을 벗어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일하는 시간 외에도 찾아 나섭니다.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겨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찾아 나서는 것을 뒤로 미루는 법이 없습니다. “오늘 내 의무를 다 했으니까 내일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즉시 행동에 나섭니다. 그 마음은 잃어버린 그 양 한 마리를 찾기까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은 다음에는 힘들었던 모든 것을 잊고 기쁜 마음으로 그 양을 어깨에 메어 짊어집니다. 많은 경우 그 양을 찾아 나서서 대화하고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그 양을 위하여 주님과 함께 대화하는 성체 조배의 시간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찾아 나서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시간이나 장소를 자기 개인화 시켜버리지 않고 자기에게 보장된 편안함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직무를 사유화시켜버리는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방해받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적법한 것이었어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목자는 자기 자신의 편리를 보장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의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님처럼 모함과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을 닮는데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 11).

예수님을 따르는 목자는 자기의 개인사들을 내버려 두는 자유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고 근무 시간을 계산하면서 시간이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두뇌를 사용하는 회계사가 아닙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목자는 양 떼에 대한 검시원이 아닙니다. 그는 50 퍼센트 혹은 60 퍼센트 정도만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자기 사명에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찾아 나섭니다. 목자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양을 찾을 수 없습니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또한 실망에도 불구하고 수고스러워도 꺾이지 않고 찾아 나섭니다. 그는 선을 행하는데 지침이 없습니다. 그는 그 누구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거룩한 끈질김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순히 문만 열어두지 않고 문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 나섭니다. 착한 그리스도인처럼 그는 항상 자신을 떠납니다. 그 마음의 중심은 그 자신 밖에 존재합니다.  그런 사제는 자신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예수님 안에서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나’라고 하는 자신에 이끌리지 않고 ‘당신’ 하느님과 형제들인 우리에게 이끌립니다.

두 번째 단어는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양들을 알고 계시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당신 생명을 바치시며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십니다(요한 10, 11-14 참조). 그분의 양 떼는 당신의 가족이며 생명입니다. 그분은 양 떼들에게 붙들린 몸의 머리가 아니십니다. 그 목자는 양 떼와 함께 걷고 그들의 이름을 부릅니다(요한 10, 3-4 참조). 그 목자는 아직 함께 하고 있지 않은 양들도 함께 모이기를 원합니다(요한 10, 16 참조).

그리스도의 사제도 이러해야 합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서 도유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교회를 통해서 그에게 맡긴 구체적인 사람들 가까이에 있도록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랑스러운 눈길과 아버지 마음으로 그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수용합니다. 그리고 고쳐주어야 할 때 항상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모욕을 주지 않고 모든 이를 위하여 험한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장갑을 모릅니다. 친교를 거행하고 살아가는 사제는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사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선 헌신하고 험담이나 판단, 독설들을 내버립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문제들을 들어주고 사람들의 여정을 함께 하면서 한없는 자비심으로 하느님의 용서를 나누어줍니다.  그는 길을 잃거나 옳은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그런 사람들 다시 받아들여서 분쟁을 조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 하느님은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루카 15, 5). 그분의 기쁨은 용서에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과 집안의 공기를 다시 만끽하는 아들에서 생겨나는 기쁨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기쁨은 그 자신을 위한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을 위한 기쁨이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참된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사제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거저 주어진 자비로 변형된 사람입니다. 거저 선사받은 사람입니다. 기도 속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발견하고 그분 사람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제는 내적으로 안정돼 있고 자비의 통로가 된 것에 대해서 행복하며 사람들을 하느님의 마음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기쁨 속에 살아갑니다. 그에게 있어서 슬픔이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고함도 그에게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양순한 마음을 따라서 사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친애하는 사제 여러분,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우리는 매일 목자로서의 우리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는 너희를 위하여 희생 제사로 바치는 내 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말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의미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사제품의 서약을 매일 새롭게 할 수 있는 단어들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대답했던 그 “예”라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매일 드러나지 않는 “예”를 하고 살고 있는 모든 분들,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신 그 “예”를 드리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해 여러분의 생명을 헌신한 여러분의 “예”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기쁨의 맑은 샘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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