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겸손은 하느님 자비를 받을 수 있는 필요조건입니다.


“하느님께서 겸손을 청하시는 것은 그분을 향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가난한 마음에 하느님의 자비가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6월 첫째날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알현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마음가짐과 자비를 청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신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를 언급하며 겸손하고 거짓없는 기도로 하느님과 이웃들을 만나야 할 것이라고 권고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알현 가르침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수요일에 인내심을 지니고 기도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이야기 들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비유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태도로 기도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청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만 할까요. 기도를 위한 올바른 태도.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루카  18.9-14)

두 사람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매우 다른 태도로 행동하였고 그 결과도 반대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기도했습니다.(11절) 그리고 많은 말들을 합니다. 하느님께 향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강도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거나 간음하는 자나, 아니면 예를 들어 그 자리에 있던 ‘세리’와 같은(11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을 드러내고자 스스로의 공덕을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 앞의 주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전에 있지만 위대하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낮출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자신에 차 있습니다. 마치 성전의 주인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한 선행을 하나씩 꼽아봅니다. 그는 나무랄데가 없고, 정해진 것보다 더욱 율법을 잘 지켰으며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였으며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사이는 기도한 것 보다도 자신이 율법을 잘 지킨 것에 대해 만족해 합니다.  더군다나 그의 행동과 말들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고, 죄인을 하찮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거나 행동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가 죄인을 멸시하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정의롭다고 여기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소홀히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얼마나 기도하느냐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어떤지를 살펴보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알아보기 위해 마음을 살펴보고 오만과 위선을 근절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저는 묻습니다. 오만함으로 기도가 가능합니까? 안됩니다. 위선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오직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느님 앞에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오만과 위선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감성과 혼돈과 혼란이라는 일상의 리듬 안에서 열정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마음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 법을 배우고, 친밀함과 침묵의 가치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곳에서부터 출발한다면 타인들과도 만날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으로 향해 걸어갔다고 확신하였지만 자신의 마음으로 향하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리는 이와 다르게 겸손과 회개의 마음으로 성전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13절)  그의 기도는 간단합니다. 바리사이처럼 길지도 않습니다. ‘오, 하느님!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그뿐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함께 세 번 말해봅시다. 다함께 말씀해 보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라고 불린 세관장들은 정결하지 못한 이들이며 정복자들과 관계가 있는 이들로 여겨졌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였고, 일반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비유 말씀에서 주시는 가르침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층에 의해 정의롭거나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와 형제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회개의 행동과 간단하고 짧은 세리의 말은 자신의 불쌍한 상황에 대한 양심의 증언인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본질적입니다. 겸손하게 행동하고 자신이 자비를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확신합니다. 바리사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면,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고 있을 뿐 입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빈 손’으로,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고 죄를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세리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시당했던 그가 결국에는 진정한 믿는 이의 모범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다음과 같이 결론 맺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낯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4절) 이 둘중에 누가 타락했습니까? 바리사이입니다. 바리사이는 기도하는 척 하지만 거울 앞에서 자신만의 자랑을 해대는 부패한 이의 모습입니다.  부패하였지만 기도하는 척 합니다. 인생에서도 다른 이들보다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믿고 타인을 낮추어보는 이들은 부패한 위선자들입니다. 오만함은 모든 선행을 약속하지만 기도는 공허하며 하느님과 타인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겸손함을 더 좋아하시는 것은 우리의 기운을 빠지게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겸손은  그분을 찬미하기 위한 필요조건 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닿지를 못합니다. 보잘것 없는 겸손이 마음을 엽니다. 하느님께서는 약점을 하나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을 향한 약점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겸손한 마음 앞에서 당신의 마음을 완전하게 열어주십니다. 이 겸손이 성모마리아께서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표현하고 계십니다.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루카 1.48,50)   우리 어머니이신 그분께서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다함께 아름다운 기도를 세번 반복해 봅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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