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하는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화요일과 금요일)


교황 프란치스코와 함께 하는 묵주기도, 고통의 신비 (화요일과 금요일)

고통의 신비

1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땀 흘리심을 묵상합시다.

“그들은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갔다.  [...]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 32-36).

함께하고 있는 현존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의미를 간직할 수 있고 사랑의 행위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맡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고통은 사랑과 신앙의 길 가운데 자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고 계신 그리스도를 관상하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그 눈길에 참여하는 것을 배웁니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이유를 알려주지 않으시지만 역사 속에 빛나는 광채를 열어주시기 위하여 고통의 역사에 결합된 현존하는 선의 역사가 가져다주는 대답을 주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신앙의 빛,  56-57항).

2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매 맞으심을 묵상합시다.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이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거듭 소리 질렀다. 빌라도가 그들에게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마르 15, 12-15).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고자 우리 손에 당신의 몸과 피를 건네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빌라도 앞에서 진행되는 재판과 같이 올리브 동산에서 이사야가 선언한 고난받는 종으로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십니다(이사 53,12 참조).  예수님은 이 지극한 사랑을 수동적인 방법으로나 불행한 운명으로 여기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분은 그 폭력적인 죽음 앞에서 인간적으로 힘겨운 초조함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에 당신을 온전히 맡기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시고자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죽음에 자신을 자유롭게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하여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분”(갈라 2, 20)이십니다. 우리 각자는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셨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7일 일반 알현).

3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시관 쓰심을 묵상합시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뜰 안으로 끌고 갔다. 그곳은 총독 관저였다. 그들은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그분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우고서는,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인사하기 시작하였다. 또 갈대로 그분의 머리를 때리고 침을 뱉고서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예수님께 절하였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자주색 옷을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마르 15, 16-19).

사랑하는 임금

예수님은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왕들에게 유보된 명예를 얻기 위하여 성도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채찍을 받고 능욕을 당하며 모독 받기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십니다. 가시관과 몽둥이질, 다해진 자주색 옷을 걸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왕, 그분의 임금으로서 품위는 바로 조롱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에 관점에서 그 왕다움을 찬란하게 빛내십니다. 예수님의 왕좌는 십자가 나무입니다! 우리가 따라가고 있고 우리를 동반하시는 임금님은 매우 특별한 분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사랑하고 봉사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시는 임금님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4일 강론).

4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마태 27, 31-32).

십자가의 논리에 들어서는 것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하여 자신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형제자매들, 특별히 더 멀어져 있고 망각하고 있는, 이해와 위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가는 것을 배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논리에, 십자가의 논리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과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생명을 가져다주는 자기 봉헌을 의미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7일 일반알현).

5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을 묵상합시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해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때에 성전 휘장 한가운데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4-4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말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게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하느님은 악에 대해서 대답을 주지 않으시고 침묵 가운데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느님은 실제로 말씀하셨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의 대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란 말씀은 사랑이고 자비이며 용서입니다. 또한 심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을 거부한다면 단죄 받는 것입니다. 그분이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단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리고 이 사랑과 용서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며 걸어갑시다. 모든 것이 사랑이신 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걸어가기로 합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움에서 가진 십자가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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