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희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아가서 그분께 우리를 열어드릴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교 희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아가서 그분께 우리를 열어드릴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26/03/2016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다”(루카 24,12). 베드로가 달려갈 때 무슨 생각들이 그의 마음과 정신을 흔들 수 있었을까요? 복음은 베드로를 포함하여 열한 제자들이 여인들의 증언과 파스카의 선포를 믿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에게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11절 참조). 베드로의 마음속에도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찬 의심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스승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수난 중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에 대한 회한.

그러나 무엇인가 특별한 전환점도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아직 그들을 믿지 않았지만 “일어나서”(12절)는 전환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집에 틀어박혀서 그저 앉아 생각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근에 있었던 어두운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으며 의구심으로 왜곡되도록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지속적인 잡담과 두려움, 가책 등으로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찾지 않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뢰에 찬 만남의 길을 더 좋아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일어서서 무덤으로 달려갔고 거기에서 그는 “놀라워하며”(12절) 돌아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활”의 시작이고 그 마음의 부활이었습니다. 슬픔과 어두움에 빠지지 않고 희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빛이 그의 마음을 질식시키지 않으면서 그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놔두었던 것입니다.

무덤으로 향료를 가져가는 자비의 행위를 완성하러 이른 아침에 나섰던 여인들 역시 똑같은 희망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5절 참조)라는 천사의 말을 들으면서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그 여인들과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희망 없이 슬픔에 젖어서 우리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면서는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닫혀있는 우리 무덤들을 주님께 열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들어오셔서 생명을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분께 원한이란 돌덩어리들과 과거의 무거움을 가져갑시다. 또한 나약함과 실수 때문에 생긴 무거운 짐 덩어리를 그분께 가지고 갑시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고립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기 위하여 도와주러 오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오늘 밤에 굴려버려야 할 첫째 바윗덩어리는 우리 자신 속에 스스로 가두어 버리는 희망의 부재입니다. 주님께서 지긋지긋한 이 함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주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신 것처럼 살아가고 인생의 중심이 우리 자신의 문제만이라고 여기면서 희망을 잃어버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되지 않도록  해주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과 우리 내면에서 여러 문제들을 보고 있고 계속해서 그것들을 볼 것입니다. 그것들은 항상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빛으로 그 문제들을 비춰야 합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을 “복음화”시켜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들을 복음화시키는 겁니다. 영혼의 시선은 어두움과 두려움에 이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도 그것들에 예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6절)라고 한 천사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시고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의 기초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긍정주의도 아니고 심리적의 태도이거나 용기를 갖자고 초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희망은 우리가 우리 자신 밖으로 나아가서 그분께 우리를 열어드릴 때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선물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위로자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술 지팡이로 악을 제거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나 생명의 참된 힘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죄와 죽음과 두려움에 대해  승리하신 그리스도께 항상 사랑받고 용서받았다는 확신성입니다. 오늘은 우리 희망의 축일이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 39 참조)고 하는 확실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은 살아계시고 살아 있는 이들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과 만남을 가진 다음 각 사람은 파스카를 선포하도록 주님께로부터 초대되었고 생명의 빛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들 안에서 희망을 일으키고 슬픔으로 짓눌린 마음에 희망을 또다시 일으키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은 아주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의 종들처럼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랑으로 가득 찬 생활을 통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적당한 규칙과 회원들을 많이 가진 국제기구가 될 것입니다. 그런 기구는 희망을 목말라하는 세상에 그것을 전달할 능력이 없는 단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희망을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밤 전례는 우리에게 좋은 권고를 던져줍니다. 전례는 우리가 하느님의 업적들을 기억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독서들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과 사랑을 열거하며 말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희망으로 양육하고 기쁨으로 활력을 주시면서 사랑의 이 역사에 우리가 들어가도록 할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기억시켜줍니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하여 “(예수님이)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6절 참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 인생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 마음을 울리던 그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징표들을 알아볼 줄 아는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열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분이 주시는 희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하고 걸어가기로 합시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기억은 찬란한 빛이어야 하며 그 빛은 영원한 그 파스카를 향한 우리의 신뢰 어린 발걸음을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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