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반대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다.


자비의 반대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다.

25\03\2016

교황궁 상임 강론 사제인 프란치스코 카프친회 소속 라니에로 칸탈라매사는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2코린 5,18)라는 코린토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을 시작했다. 그의 강론에서 사도 바오로의 이 호소는 단순히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역사적 화해’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 역사적 화해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룩되었던 것이기 때문임을 그는 지적한다. 오히려 이 화해는 이미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코린토의 신자들, 이것은 곧 현재의 우리 자신과 관련된 화해라는 점을 칸탈라매사 신부는 강조한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하느님과 인간과 화해는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강론 사제는 우리에게  “우리가 주님의 기도 중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바칠 때 우리 안에서 그 모든 묵상들에 앞서서 떠오르는 감정들과 생각들의 덩어리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고한다.

우리의 내면에 떠오르는 하느님에 대한 모습은 “최고의 존재, 전능하신 분, 시간과 역사의 주님”이며 이러한 하느님은 “악으로 뒤흔들린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신적인 벌을 주면서 개입하는 분”이었음을 강론 사제는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로마서 3, 21에 나온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라고 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은 자비를 행하시면서 정의를 세우신다”는 점을 말한다.  칸탈라매사 신부는 “하느님의 정의는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시편 3,9)과 같이 하느님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라는 성 아오구스티노의 글을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믿는 이들, 당신 마음에 드는 이들을 의롭게 만드시는 행위”인 점을 설명한다.

더 나아가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보다 더한 것을 행하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 죄를 짊어지신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 아드님은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짊어지셨다.’”는 점을 칸탈라매사 신부는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칸탈라매사 신부는 자비의 반대말이 정의가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면서 그 반대는 “복수”라는 점을 지적한다. “자비의 반대는 정의가 아니다. 그것은 복수다. 예수님은 정의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자비를 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을 반대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죄를 용서하시면서 정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복수를 포기하신 것이다. 그분은 죄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에제 18,23 참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당신의 복수를 해달라고 청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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