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죄인이라 느끼는 겸손한 사제는 자비로 용서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월 9일 세계 카푸친 공동체가 참석한 미사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집전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 11일까지 안치되는 카푸친회의 성인 고해사제,  성 피엘트레치나의 비오 사제(오상의 성 비오 신부)와 성 만딕의 레오폴드 사제의 유해와 함께 미사가 봉헌되었다.

교황은 자비의 희년을 맞아 고해성사가 용서임을 드러내며 고해자들의 영혼에 위안과 용서와 평화를 주는 카푸친 회원들과 고해사제가 되기를 청하면서  하느님 사랑을 전해주며, 고해사제가 열린 마음과 넓은 사고로 성사에 임하고, 죄인의 고통이 있는 곳에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하 교황 강론 전문

오늘 말씀의 전례에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서 보여지는 태도로 솔로몬 왕의 겸손으로 표현됩니다. 또다른 태도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이 소소한 전통까지도 율법에 매달려 지키려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이야기에서 보여지는 인색함 입니다.

카푸친회 여러분들의 전통은 용서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좋으신 고해사제들이 많이 계십니다. 크리스토포로 수사님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주님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열왕기 상권 8.30 참조) 그리고, 기도할 줄 알기에 용서할 줄 압니다.

이와 반대로, 용서의 필요성을 잊어버릴 때 점차 하느님을 잊게되고, 용서를 청하는 것을 잊게 되며 용서할 줄 모르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 느끼는 겸손한 이는 고해실에서 잘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깨끗하며’ ‘스승들’이라고 느끼며 단죄만 할 줄 압니다.

저는 여러분의 형제로서 여러분들과 모든 고해 사제들에게 말합니다. 특별히 자비의 희년을 맞아 고해실은 용서를 위한 곳 입니다. 죄를 사해줄 수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보더라도, 제발 그들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고해실에 오는 이들은 자신의 영혼에 용기와 용서,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을 포용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무척 사랑하십니다.’라고 이야기해 줄 사제를 만나고자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긴 미안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는 더이상 고해성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게 이런 저런 질문을 하셨거든요. 제게 …이렇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지요. 부탁드립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느끼리라 믿습니다. 

카푸친회 여러분들은 용서라는 주님의 특별한 은총을 가지셨습니다. 용서하기를 멈추지 말아주시길 청합니다. 어떤 교구에서 한 분의 사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최고 책임자의 자리에 계셨다가 은퇴를 하고 70살에 성지의 고해실로 보내졌습니다. 그분이 계신 고해소 앞에 용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습니다. 사제들, 평신도들, 부자들, 가난한 이들,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용서를 해주시는 위대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용서해 주시거나 마음에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가 그분을 뵈러 갔고 그분은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들어 주십시오. 당신은 주교님이시고 제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나치게 용서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믿습니다. 그런 양심의 가책이 듭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용서를 해 줄수 있습니다.’ 그분에게 그런 느낌이 들 때 어떻게 하시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제대의 감실 앞에서 ‘주님 용서해 주소서. 오늘 지나치게 많이 용서해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제게 이런 나쁜 모범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용서의 사람들이, 화해와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 주십시오.    

삶에는 많은 표현방법이 있습니다. 어휘로 드러나는 표현방법 외에도 행동으로 들어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고해실에서 만일 누가 나에게 다가온다면 그사람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며 그것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수 있지만 행동에서 이것이 드러납니다. 이 사람이 다가온다면 변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변화하여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며 다가온다는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에게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고해실로 온다면 더이상 잘못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자신의 삶에 주어진 환경과 의식과 상황 때문에 그러기를 여러번 하였어도 말입니다.  아무도 불가능한 것을 하도록 강요당해서는 안됩니다.( Ad impossibilia nemo tenetur)

용서를 향해 마음의 지평을 넓혀야 합니다. 용서는 하나의 씨앗이며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믿으십시오. ‘당신은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며 원죄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교에 빠지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고해사제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카리스마를 갱신하십시오. 언제나 새롭게 해야 합니다. 위대한 용서하는 이가 되십시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의 율법학자처럼 되어 버립니다. 위대한 단죄자는 언제나 벌을 줍니다. 성서에서 벌을 주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악마입니다. 오랜 시간 앉아서 기도하였던 비오 성인과 레오폴도 성인처럼 기도하여,  용서를 통해 삶을 주시는 예수님처럼 하십시오.  아니라면 악마가 하는 것처럼 단죄하고 벌하게 됩니다. 어떻게 달리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모든 고해사제들에게 말합니다. 잘 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겸손해지고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저는 미사를 집전하고, 바닥 청소를 하고 모든 것을 하지만 고해성사는 잘 할 줄 몰라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은총을 청하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모든 고해사제들을 위해 그리고 저를 위해 주님께 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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