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노드 폐막미사 강론. 그분에 대해 말하고 일하지만 마음에서는 멀어져 있습니다.


가정을 위한 시노드, 제 14차 세계주교대의원회가 10월 25일 미사로 폐막되었다. 주교들은 3주간의 회의를 통해 교회와 현대세계에서의 가정의 소명과 사명에 대하여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하 교황의 미사 강론

오늘 일요일 세 부분의 미사 독서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와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나라에 위기가 닥치고 사람들은 적들에게 유배를 당합니다. 그럴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선포합니다.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31장 7절)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은 아버지 이십니다(9절 참조) 아버지로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아이들을 돌보시고 그들이 가는 길을 동반해 주시고 ‘눈먼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31.8) 을 보살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이시기에 그들이 가는 길, 수많은 눈물과 슬픔을 겪고 난 후에 오는 위로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사람들이 신앙 안에 머문다면, 머나먼 땅에서도 하느님 찾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유배를 자유로 바꾸어 주시고 고독을 친교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던 사람들이 내일엔 기쁨으로 환호할 것입니다.(시편 125.6 참조)

우리가 이미 시편에서 표현하였듯이 기쁨은 주님 구원의 열매입니다. ‘우리 입은 웃음으로 우리 혀는 환성으로 가득하였네’(시편 125.2). 믿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자신의 삶에서 체험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목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의 힘과 능력을 넘어선 추수의 기쁨과 감사가 있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히브리서간에서는 예수님의 자비를 보여줍니다.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히브 5.2) 무지하고 실수하고 있는 이들에게 자비를 느끼십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사제이시고 거룩하시며 결백하시지만 죄로부터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4.15 참조), 우리의 약함과 모든 성정까지도 취하신 최고 사제이십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새롭고 영원한 계약의 중재자가 되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제1독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유롭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듯 바르티매오도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 자유롭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예리코를 막 떠나셔습니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여정을 시작하셨음에도 바르티매오의 울부짖음에 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청에 마음이 움직이셨고 그의 상황에 관여를 하시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구호품을 주려고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와 직접 만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무런 지시나 답을 주시지 않고 그저 물어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51) 의미가 없어보이는 질문입니다.  장님에게 볼 수 있는 것 말고 다른 소원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면해서 직설적이나 존중의 마음을 담아 이 질문을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직접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와 삶과 진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그 어떤 것도 그분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바르티매오를 치유하신 다음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그리스도께서 바르티매오의 믿음을 어떻게 칭찬해 주셨는지 보는 것은 아름다운 일 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믿는 것보다 더 우리를 믿으십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서 바르티매오를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눈먼이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나머지 복음 부분에서 사용하셨던 두 가지 표현을 합니다.

“마음을 가져라!” 라는 표현은 “믿음과 강한 용기를 가져라”라는 뜻 입니다. 사실 예수님과의 만남만이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상황을 대면할 용기를 줍니다. 두번째 표현은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손을 잡아 치유해 주셨던 말씀으로 “일어나라!” 입니다. 그분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용기와 자유의 말씀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예수님께 바로 데려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불리움 받은 것입니다. 오늘날 특히 오늘날에도 말입니다. 사람들을 구원해 줄 연민의 자비심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이 바르티매오처럼 울부짖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특히 그분의 마음을 따라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고통과 위기의 순간들이 하느님 자비의 순간입니다. 오늘날은 자비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유혹이 존재합니다. 복음에서는 최소한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듯 멈추어 섰던 제자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걸어갔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장님이라면 그들은 귀머거리 입니다. 그의 문제가 제자들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험한 것입니다. 지속적인 문제에 닥쳤을 때 그 문제로 염려하기 보다는 지나쳐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자들처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더라도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룹에 속해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열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이와 감사와 열정을 잃어버리고 은총에 마음이 움지이지 않는 습관을 가지게 되는 위험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말하고 그분을 위해 일할 수 있지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그분의 마음에서는 멀리 떨어져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혹입니다. ‘영적인 환상’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있는지도 모르면서 인간의 사막을 걸어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대신 우리는 보고싶은 것만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관점을 발전시킬 능력이 있지만 우리 눈앞에 주님의 나라가 있는 것은 거부합니다. 믿음은 사람들의 삶에서 뿌리를 내릴 줄 모르고, 오아시스 대신 황량한 또 다른 사막을 만들에 그곳에 머뭅니다.    

두번째 유혹이 있습니다. ‘계획되어진 믿음’에 빠지는 것 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과 함께 걸을 수 있지만 우리는 이미 자신만의 여정을 계획해 놓았고 준비도 마쳤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얼마나 걸릴지도 압니다. 모두 나의 리듬에 맞추어 주어야 하고 모든 문제는 귀찮습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바르티매오에게 인내심을 잃고 꾸짖었던 ‘많은’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들은 조금 전 아이들에게도 화를 내었고(마르 10.13) 이제는 눈먼 거지에게 그렇게 합니다. 누구든 우리를 귀찮게 하거나 우리 수준이 아니면 소외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은 반대로 모두를 품고 싶어하십니다. 그에게 울부짖는 소외받은 이들을 품으십니다.  바르티매오와 같은 이들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고, 구원을 향한 최고의 길이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마지막에서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52절 참조). 그는 자신의 시력을 찾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이들의 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친애하는 시노드의 교부 여러분, 우리는 함께 걸어왔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형제 자매만을 바라보고 걸어온 길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힙니다. 복음이 우리의 시대에 알려주는 길을 찾으며 가족 사랑의 신비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길로 다같이 따라갑시다.  그분의 치유와 구원의 시선으로 우리를 봐주시기를 청합시다. 그 시선은 영광이 빛나듯 어떻게 해야 빛이 퍼져나가는지 알고  있습니다. 비관론이나 죄로 우리가 흐려지게 내버려두지 맙시다. 풍성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찾고 우러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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